[이주윤의 딴생각] 아이고, 내 팔자야!

2022. 11. 26.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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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시장엘 가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어디야, 밥은,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언제나 “별일 없지?”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면 “그래, 궁금해서 전화해 봤어” 하는 말로 통화가 마무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중요한 얘기라도 하려는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괜스레 불안한 마음에 귀를 쫑긋 세웠다. 엄마는 국가 기밀을 전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만 이렇게 속삭였다. 닭 모양 브로치를 하나 사서 가방에 달고 다니라고 말이다.

“아니, 소랑 닭이랑 궁합이 좋대. 그래서 소띠는 닭 모양 액세서리를 지니고 다녀야 인생이 풀린다는 거야. 너 소띠잖아.” 도대체 누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다 했을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출처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엄마의 대답에 그만 박장대소하고야 말았다. “누구긴 누구야. 유튜브!” 엄마는 소와 닭의 찰떡궁합에 대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니만 닭띠 남자와의 선 자리를 마련해 봐야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엄마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승전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또 속은 내가 바보였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을 왜 너만 못 하는 거냐며 엄마가 성화를 부릴 때면 한술 더 떠 노발대발 성을 내곤 했지만 요즘에는 “그러게, 왜 그럴까. 거참 희한하네” 하며 허허 웃고 만다. 당신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나를 아무 남자하고나 결혼시키려 한다는 오해의 시절을 지나, 험난한 세상을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노심초사한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별일이 있더라도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닥친 건 아니다. 하지만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비혼이니 뭐니 말은 많아도 내 주변에 결혼하지 못한 건 나뿐이고, 떨어진다 떨어진다 해도 여전히 비싼 집값에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꾸게 생긴 데다가,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에 백 살까지는 너끈히 살 것 같은데 그때까지 이 한 몸을 어떻게 먹여 살린단 말인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인생이 풀릴 조짐이 보이지 않아 미치고 팔짝 뛰기 일보 직전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와 궁합이 좋다는 치킨 한 마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벗 삼아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안감이 사그라들지 않을 때에는 휴대폰 앱 스토어에 들어가 사주 앱을 내려받는다. 혹자는 말한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사람의 운명이 똑같은 게 말이 되냐고. 상식적이지 못한 사람들이나 그런 걸 믿는 거라고. 타고난 사주가 어떻든지 간에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거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반박하겠다. 안다고. 그런데 어쩌라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신세 한탄하거나 터덜터덜 편의점으로 걸어가 소주를 사 오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겠냐고 말이다.

사주 정보 입력란에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차례로 넣고 확인 버튼을 누른다. 고객 서비스 차원인지 아니면 내 사주가 정말로 그러한지 몰라도 뜻밖의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다. ‘당신의 인생의 흐름은 초년에는 그 운기가 약하여 힘들고 고된 날을 보내게 되는 일들이 많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생의 성취가 매우 커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편안하고 안락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지나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뻔하고도 무책임한 위로에 웃기게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무래도 믿을 수는 없지만 속는 셈 치고 그때가 오기를 기다려 보자며 현재의 나를 다독인다.

“얘, 닭 브로치 샀니?” 꼬끼오 하는 수탉의 울음소리 대신 엄마의 닭 타령으로 잠에서 깼다. 화성에 가느니 마느니 하는 시대에 그런 미신을 믿느냐고 퉁을 놓으려다가 간밤에 사주를 보고 편안하게 잠든 내 모습이 떠올라 말을 삼켰다. 엄마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닭 브로치를 살 필요가 없게 됐다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은 닭띠 총각을 찾았다나 뭐라나. “예예, 잘 알겠고요. 이만 끊겠습니다.” 엄마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닭띠 총각의 신상을 줄줄 읊는다. 도대체 편안하고 안락한 세월은 언제쯤 오는 거야. 아이고, 내 팔자야!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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