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로 돌아본 김선도 목사의 삶과 신앙

이현성 입력 2022. 11. 25. 18:51 수정 2022. 11. 25.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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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92세… 장례예배는 28일 오전 9시30분 광림교회에서 엄수
“교회는 섬김의 화목과 구별됨으로 복음 전해야” 강조
기독교대한감리회 제21대 감독회장을 지낸 김선도 광림교회 원로목사. 연합뉴스

기독교대한감리회 제21대 감독회장을 지낸 김선도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25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세계 최대 감리교회를 일군 김 목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과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 한국월드비전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대표적인 한국교회의 원로 목회자로 꼽혀왔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기독교대한감리회장으로 치러진다. 입관 예배는 26일 오전 10시, 장례예배는 28일 오전 9시30분 예정돼 있다. 장지는 경기도 광주의 광림수도원이다.

김 목사는 2018년 총 35회 연재된 국민일보 미션라이프의 ‘역경의 열매’ 코너에서 80년간의 신앙 경험을 나눈 바 있다. 역경의 열매를 통한 그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의 고향인 평북 선천에 1910년 세워진 선천 남교회. 국민일보DB

김 목사는 1930년 12월 2일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선천은 축복의 공간이었다. 기독교의 살아있는 역동성과 원형을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당시 선천은 기독교 복음화율이 50% 이상이었다. 그의 가정은 선천에 뿌리내린 기독교 문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주님, 저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자를 걷게 하고 눈먼 자를 보도록 치유하신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고통받는 이 시대의 병든 자를 주님처럼 치유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게 해주세요.’ 학창 시절, 의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1948년 신의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북한군은 기민하게 징집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그에게 군의관 장교 배지를 달아줬다. 꿈에서조차 북한군에 협력할 생각이 없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군의관복을 입었다. 청진기와 알코올, 밴드, 테이프가 들어있는 손가방도 함께 멨다.

‘그래, 월남할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 기회를 놓쳐선 안 돼.’ 공산주의 체제에 환멸을 달고 산 그는 호시탐탐 월남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그가 속한 부대가 전투에서 패했다. 그는 환자를 챙기는 척하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는 북한군과 반대로 국군이 있는 곳을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결국 그는 국군과 맞닥뜨렸다. 생사의 기로에 선 그에게 국군 장교가 말했다. “당신이 필요하오. 보아하니 북한 군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이쪽에 다친 군인이 많으니 도와주시오.” 포로가 될 줄 알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 그는 국군 1사단 11연대에 입대했다. 불과 5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간부들끼리 논의하는 일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북한군에서 국군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가족을 찾기 위해 도착한 부산과 전북 군산은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1953년 가을 전쟁이 끝나고, 그는 갈 곳을 잃었다. 임시 군의관 신분이었기 때문에 휴전 후 군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막막한 상황에서 가족이 떠올랐다. ‘부모님과 형제들은 월남했을 것이다. 분명 남한 땅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가족들과는 아버지와 의형제였던 분을 우연히 만나면서 연결됐다. 가족들이 전북 군산에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한달음에 군산으로 향했다. 군산에서 가족을 만난 그날, 아홉 식구는 가정예배를 드렸다. 어머니가 기도하셨다. “하나님, 우리 아홉 식구를 한 명도 버리지 않으시고 다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가족 모두 하나님께 생명과 모든 것을 바치며 살겠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연로하신 상황이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그는 홀몸으로 상경했다. 그는 곧장 의무사령부로 향했다. “김선도라고 합니다. 해주의학전문학교 출신인데 월남해 국군 군의관을 지냈습니다.” 의료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던 탓일까. 면접 후 그는 곧바로 채용됐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의 경기도 의정부 군병원 근무 시절.

그는 의정부 유엔 종군 경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일하게 됐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그는 의정부역 근처에 있는 의정부 감리교회에 다녔다. 감리교와 그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의정부 감리교회를 다니기 전까지 그는 장로교 소속이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반발심이 올라왔다. 가끔씩은 목사님에게 항변하기도 했다. “목사님, 존 웨슬리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권위를 축소하는 것 아닙니까.”

교리 문제로 목사님과 밤늦게까지 토론을 벌였지만 생각은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에게 말했다. “김 권사님, 감리교 신학을 해 보시지요. 신학교에 가서 답을 구하면 되잖아요. 김 권사님, 목사가 되기로 서원도 하셨다면서요. 이제 그때가 온 겁니다.” 그렇게 그는 1954년 4월 감리교신학대에 입학해 감리교 신학을 이해했다.

1969년 미국 웨슬리신학대 유학 시절 미 해군 군목과 함께한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

신학을 공부하면서 첫 사역지인 서울 전농감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중이었다. 그의 마음에 군목을 하고 싶은 바람이 부풀었다. 풋풋한 젊음의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는 곳이 군대라고 생각해서다. 기도 응답을 받은 그는 원서를 제출하고 합격증을 쥐었다. 북한군 군의관이었던 그가 대한민국 공군 장교가 됐다. 꼭 12년 만의 일이었다.

공군 군목으로 복무하던 중 헤롤드 디울프 미국 웨슬리신학대 학장이 부대를 찾았다. 부대와 예배당을 둘러본 디울프 학장에게 교육기술단장이 당시 군목이었던 김 목사를 소개했다. “한국 공군 군목 중 이상한 분이 있습니다. 김선도 군목입니다. 이분은 전도를 하겠다며 사병과 구보를 함께하고 영창까지 들어갑니다. 새벽엔 지프차를 타고 초병을 찾아가 위로합니다. 주일 예배당에 800명이 몰려듭니다. 별난 분입니다.”

얼굴이 빨개진 디올프 학장은 그에게 제안했다. “채플린 킴, 혹시 당신 미국으로 유학 올 생각 없습니까.”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예, 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그는 미국 워싱턴DC 웨슬리신학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웨슬리신학대학에서 그는 종교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울러 유학 시절 그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했다. 1970년 2월 유학생활을 마친 뒤에는 공군사관학교에서 군목 임무를 수행했다.

1980년대 초반 서울 광림교회 전경.

1971년 11월에 전역한 그는 서울 광림교회로 갔다. 광림교회에서 그는 시간과 열정을 모두 설교에 쏟아부었다. 꼬박 하루를 설교 준비에 할애했다. 성도들의 걸음을 교회에 멈추게 할 설교 소재를 찾기 위해서였다. 생각을 건지려는 독서와 탐구는 그에게 일상이었다. 무언가 떠오르면 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의 구도를 이어 나가기도 했다.

그는 1994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남연회 감독에 선출됐다. 이듬해엔 제21대 감독회장을 맡게 됐다. 감독회장이 된 그는 가장 먼저 웨슬리의 전도운동과 선교를 활성화하는 일에 집중했다. 이어 2001년 4월 그의 43년 목회활동에 공식적인 마침표가 찍혔다.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2013년 9월 광림사회봉사관 봉헌예배에서 축도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가. 김 목사는 오래 전부터 답을 품고 있었다. “무엇으로 세상을 감동시킬 것인가. 무엇으로 세상에 교회가 매력을 발산할 것인가. 그 겉살은 ‘경건함’과 ‘섬김’이요 감춰진 속살은 ‘복음주의’가 돼야 한다. 세상 속에선 섬김의 화목을 이루는 동시에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구별됨이 있어야 한다. 그 묘한 이중성이 교회의 매력이 발산되는 지점이고 그곳에서 복음이 선포돼야 한다.”

이현성 인턴기자 jonggy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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