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레터] 외신은 공개했는데 왜 공개 못하냐고?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2. 11. 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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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한 일은 ‘앞으로 유사한 사태 일어나지 않게’ 대책 수립
진정한 추모는 이와 같은 비극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것

“이미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여러 외신은 국내외 희생자 상당수의 사진과 사연을 유족 취재를 바탕으로 실명으로 보도한 바 있다.”

“이번에 시민언론 민들레와 더탐사가 공개한 명단은 얼굴 사진은 물론 나이를 비롯한 다른 인적 사항에 관한 정보 없이 이름만 기재해 희생자들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는 않는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합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시민언론 민들레’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두 문장 모두 명단 공개에 문제가 없음을 주장하기 위한 내용입니다. 첫 번째는 외신도 공개한 실명을 민들레가 공개한다고 문제가 될 게 무어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기에 일각에서 나오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걸리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심지어 야당 지지자인 어느 변호사는 “개인정보호법에서 개인정보란 살아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이고 성명 주민등록번호 및 영상 등을 통해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로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인 데다 성명만으로 특정이 되었다고 보기 어려운데 무슨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죠.

외신이 일부 희생자와 관련한 내용을 실명으로 보도한 것은 해당 유가족이 취재에 응하고 공개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외신은 했는데 왜 우리는 안 되나’라는 주장이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인가 아닌가’라는 것도 의미가 없는 논쟁입니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명단 공개 논란의 핵심은 법 위반이 아니라 유족 동의니까요. 참사가 발생하면 희생자 사연을 취재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는데, 이런 경험은 취재를 한 기자에게도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이때 기자들이 중심을 잡게 해주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피해자나 유가족 뜻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앞으로 이와 유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촘촘한 사전 방지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행안부는 11월 17일 “현장 인파 관리 시스템을 내년까지 구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사고가 언제, 어디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지 예측하는 기술을 확보하고, 대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지자체와 경찰서, 소방서는 각각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지침과 규정 마련도 시급합니다. 이런 논의들이 ‘명단 공개’ 논쟁에 뒤덮여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어쩌면 진짜 재난일지도 모릅니다.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추모일 텐데 말이죠.

갑자기 ‘하얀 코끼리’가 생각납니다. 예전 어느 태국 국왕이 아주 맘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하얀 코끼리 한 마리를 하사했다죠. 하얀 코끼리 몸에 티끌이라도 묻을까 신하는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왕의 선물을 함부로 다룬다고 난리가 날 테니까요. 또, 신하는 하얀 코끼리를 먹이고 관리하느라 엄청난 돈을 써야만 했죠. 이때부터 겉만 번지르르 쓸모는 없는데 관리하기 어렵고 돈만 많이 드는 것을 가리켜 ‘하얀 코끼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쓸모없고 대가가 비싼 논쟁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꼭 하얀 코끼리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85호 (2022.11.23~2022.11.2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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