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권의 감성골프] 연속 OB 날려 멘붕된 동반자에 날린 한마디
공이 연못 가장자리에 빠지는가 싶더니 바위에 맞아 튕겨서 그대로 핀에 가서 붙는 게 아닌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탭인 버디로 홀을 빠져나왔다.
버디 값을 한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닌 모양이다. 바로 다음 좁다란 롱홀(파5)에서 티샷한 공이 OB(Out of bounds)를 내고 이름도 생소한 쿼드러플 보기(4타 초과)를 범하고 말았다.
전 홀 짜릿한 쾌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날은 샷 난조로 공이 도로나 나무에도 맞아 죽는가 싶었는데 기사회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평소와 비슷한 스코어였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동반자들은 절대 모르고 나만 아는 샷 감이 있다. 운에 따른 쾌감보다 실력이 따라주지 않아 내게는 아쉬움을 더 남긴 라운드였다.
“홀인원이나 우연히 버디를 잡으면 순간 흥분 물질이 강하게 분비돼 쾌감을 극도로 끌어올립니다. 쾌감은 임계치에 오른 다음 급속도로 떨어지죠.”
현 정신과의원 김기현 원장은 운에 따른 쾌감은 지속되기 어려워 계속 운발이 따라줘야 한다고 말한다. 쾌감 중독이다. 계속 홀인원이나 연속 버디를 아마추어 골퍼가 해내겠는가.
자주 함께 하는 지인이 용인 소재 골프장에서 평소와 비슷한 80대 초반 스코어를 받아들었다. 표정이 밝아 물었더니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날 정말 오랜만에 더블 보기를 하나도 범하지 않아 만족한다며 싱글벙글했다. 골프를 끝내고 밥을 먹는 얼굴도 환했다.
‘버디 2개+더블 보기 2개’보다 ‘파 2개+보기 2개’가 더 보람이라면서 분위기를 이어갔다. 꾸준한 연습으로 무너지지 않는 골프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동반자들 축하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쾌감보다 만족이 한 차원 높은 감정이라고 골프 철학론까지 들고 나왔다. 쾌감은 운에 좌우되지만 만족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란다.
원 볼 플레이를 위해 그만큼 노력했고 진지하게 경기에 임한 결과여서 더욱 값지다. 이때 느끼는 만족감은 한순간 지나가는 짜릿한 버디 쾌감에 비할 바 아니다. 18홀 여정을 함께 한 공을 보면 정마저 든다.
그린은 골퍼에게 영원한 공포 무대다. 티샷과 어프로치샷까지가 학력고사라면 퍼트는 본고사다. 고시 2차 시험이나 다름없다.
경기도 곤지암 소재 골프장에서 3퍼트를 하나도 범하지 않은 동반자를 본 적 있다. 80대 중반 스코어였는데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보기를 목표로 하는 골퍼였다. 3온 1퍼트 혹은 3온 2퍼트를 전략으로 삼는다고 했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거리 욕심 대신 퍼트에 정성을 들인다. 잘하면 파, 못하면 보기를 한다는 전략이다.
3퍼트 없는 골프도 부단한 노력과 인내의 산물이다. 여기서 오는 만족도 대단하다. 필자도 몇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다.
그 노력을 가상히 여겨 노 보기(No boggey), 원 볼(One ball), 노 3퍼트(No 3 putt) 플레이를 펼치면 스코어 상관없이 크게 축하해야 하지 않을까.
보람 골프도 있다. 깊은 러프나 숲에 떨어진 공을 함께 찾아 정상 플레이를 펼친 동반자가 건네는 고마움은 나에게는 보람이다. 버디를 잡고 내 버디 값을 면해준다.
연속 OB 두 방을 날린 동반자에게 던지는 위로 한마디가 공황 상태에 빠진 그를 조금이나마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면 그 또한 보람이다. “맨날 잘하면 난 어떡해. 그래도 넌 평소 잘 치잖아 나를 봐 나를~”
보람 골프가 가장 행복하다. 내 품격을 유지하면서 동반자와 팀에 기여하고 헌신할 때다. 쾌감과 만족은 개인적이지만 보람은 관계에서 형성된다.
“삶의 비밀을 말하는 세 마디. 관계를 통한 변화(크리슈나무르티).”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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