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다시 축구를 보기로 했다
그대로 나타나는 감정이입이 축구의 최고 매력
젊은이들의 죽음을 본 먹먹함 경제 먹구름과 정치의 암울함
잔뜩 침체해 어렵게 버텨가는 이 시대 한국인의 마음이
저 아름다운 경기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조금이나마 어루만져지기를
2000년 250만명이던 한국 프로야구 관중은 2009년 592만명이 됐다. 폭발적 증가세를 보인 10년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해가 2002, 2004, 2006년 딱 세 번 있었다. 홈런왕 이승엽 선수의 일본 진출 공백이 컸던 2004년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번은 모두 월드컵이 열린 해였다. 축구판이 벌어지면 야구장을 찾는 발길이 뜸해졌다. 90분간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축구와 중단의 연속인 야구. 전혀 다른 성격만큼 두 종목의 팬층은 확연히 다르지만, 그 시절 월드컵은 아무리 골수 롯데 팬이라도 반드시 관전하고 응원해야 하는 것이었다.
축구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한다. 무리지어 벌판을 뛰어다니며 사냥하던 원시인류의 DNA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데, 그 생존 방식을 충실히 구현했다. 문명을 일군 손의 사용을 자제한 채 둔한 발로 먹잇감(공)을 쫓는 경기는 그래서 인류가 고안한 스포츠 가운데 가장 널리 퍼졌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방영된 통신사의 ‘Reds Gone(레즈가 사라졌다)’ CF는 거리응원 무대인 세종로가 텅 비어 있는 모습을 담았다. 이런 메시지였다. ‘당신의 혈관 가득 흐르는 축구의 피는 어디로 갔는가. 어서 뛰쳐나와 이 광장을 채우라!’
‘한국은 축구다’(김화성)라는 책이 있고 ‘축구는 한국이다’(강준만)란 책도 있으니 한국인에게 축구 DNA가 충만한 건 틀림없다. 그런데 그 열정에는 본능의 발현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고 강준만 교수는 말했다. “한국인은 축구를 사랑하지만, 축구를 통해 얻는 가치를 더 사랑한다.” 축구로 일본과 북한을 꺾는 데서 만족을 얻었고, 박종환 사단의 세계 4강 이후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수단 중 하나로 여겼다. 우리가 잘하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국제무대에서 확인받으려는 개도국·중진국 시절의 인정욕구는 한국인을 국가대표팀 경기에 유독 몰두하게 했다.
이런 열정이 폭발한 한일월드컵과 여진이 이어진 독일월드컵을 거쳐 남아공월드컵에 이르러 우리는 ‘SBS 단독중계’로 월드컵을 시청했다. 축구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채널 선택권이 보장된 첫 월드컵. 그 해설을 맡은 차범근 위원은 일본이 카메룬의 골네트를 흔들자 환호하며 말했다. “아시아 팀이 잘하는 건 우리에게도 반가운 일입니다.” 아시아 몫의 월드컵 티켓이 늘어나게 된다는 뜻이었는데, 이제 축구 말고도 일본보다 잘하는 게 많지 않으냐, 축구에서 일본을 이성적으로 볼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처럼 들렸다.
내 기억 속의 월드컵은 여기까지다. 이후 브라질과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열렸지만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야구보다는 축구를 조금 더 좋아하는 편인데도 왠지 챙겨보지 않게 됐다. 러시아월드컵이 열린 2018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었고 경제규모 세계 10위에 올라섰다.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일본과 대등해졌다. 축구로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욕구, 세계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갈증이 많이 해소된 그 무렵, 중계방송 캐스터는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수들이 오늘 경기를 충분히 즐기면 좋겠네요.”
한국인이 축구를 통해 얻는 가치보다 축구 자체를 사랑하게 될수록 나는 자연스레 그 대열에서 떨어져 나왔다. 수렵 DNA를 많이 가진 이들에게 사냥꾼의 스포츠를 양보했다고나 할까. 다시 4년이 흘러 야구 시즌과 겹치지 않는 첫 월드컵이 열리고 있다. 이제 유엔이 공인한 선진국이 된 터라 갑자기 인정욕구가 발동한 것도 아니고, 딱히 야구팬이 아니니 11월의 대회라 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데, 나는 TV를 켰다. 요즘 월드컵을 보고 있다.
축구의 매력은 카타르시스에 있다. 야구장의 관중은 감독이 돼서 작전을 생각하지만, 축구장의 관중은 선수가 돼서 90분 내내 일어나 뛰고 소리를 지른다. 붉은 악마를 열두 번째 선수라 하지 않던가. 그라운드 선수들이 짓는 환희와 고통과 허탈의 모든 표정이 관중의 얼굴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축구를 종교적 제의(祭儀)에 빗대곤 하는 것도 선수들의 격렬한 몸짓에 나를 이입해 응어리를 토하게 해주는 카타르시스 기능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것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의 죽음을 바라본 먹먹함이, 어려운 경제의 먹구름이, 만날 그 모양인 정치의 암울함이 한국 사회에 짙게 드리웠다. 한바탕 토해내야 다시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나. 많은 이들이 저 아름다운 경기를 즐겼으면 한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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