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시장이라고 다 똑 같은 시장이 아니다
나무를 보면 살아온 역사를 그 몸에 간직하고 있다. 어느 해 폭설로 휘어지고 뒤틀린 가지, 어느 해 병충해로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짧은 가지 간격-모두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람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겪어온 모든 삶의 일, 역사의 순간들이 그 사람, 그 사회의 오늘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 것을 부인하려 해도, 부정하려 해도, 그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 시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조선과 일제치하, 개발독재와 민주화를 거친 역사의 유산을 오늘날의 모습에 담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현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미래를 위해 더 잘 고쳐나갈 수 있다.
유럽에서는 중세 이후 자유도시와 상업, 수공업의 동업조합인 길드가 발전해왔다. 지금도 유럽 도시들에는 시내중심에 길드홀이 우뚝 서있다. 런던시장이 매년 주최하는 길드홀 연회는 영국에서 가장 성대한 연회다. 큰 홀에는 각 길드를 상징하는 수 많은 깃발들이 걸려있다. 이 길드조직에서는 도제가 수년간 장인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어느 정도 수공업자로서의 자세와 기술을 익히게 되면 져니맨이라는 자격을 얻어 다른 도시들에 가서 그 곳의 동향, 기술들을 배우고 돌아와 비로소 자신의 상품을 만들어냈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masterpiece)이 길드의 장인들로부터 인정받으면 그도 장인(master)의 자격을 얻는 것이다. 길드와 시장은 자율적 규제와 내부 규율을 세우며 발전 성장했다. 제조업, 금융업, 회계업도 그렇게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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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제완화 자체가 정부목표 되면
기득권 강화로 귀결될 위험있어
자율규제·내부규율이 취약한 시장
공정경쟁 위한 제도기반 필요해
」
한국 자본주의는 그러한 발전 과정을 거쳐오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는 사유재산권 제도는 일제총독부가 일본의 민법과 상법을 한반도에 의용한 조선민사령(1912년)에 의해 도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토지등록 제도도 없었다. 일제는 한일합방 후 지적조사를 시행해 토지등록제도를 도입했고 지역사정에 밝은 지방 아전 출신들이 이 과정에서 대거 땅을 차지해 신흥지주 계급으로 등장함으로써 민중들의 지주에 대한 존중심도 생기지 않았다. 조선시대까지 상공업은 주로 하층민들의 몫이었다. 일제시대 신분계급이 무너지면서 과거 상공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새로 족보를 만들어 다른 생업을 찾아 나섰고 선대가 객주, 수공업, 보부상 등에 종사했다고 떳떳이 내세우는 집안은 찾기 어려웠다. 이는 수백 년 식당과 상점을 대를 이어 경영하는 이웃 일본, 중국의 전통과도 사뭇 다르다.
서구자본주의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자유주의사상과 결합하면서 크게 발전했다. 자유시장 경제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지구촌의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제도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공동체적 윤리를 결합시키며 발전해왔다. 반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독특한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 일제총독부는 조선에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일본의 신흥재벌들에게 수많은 특혜를 주어 비료, 발전, 합판 사업 등에 투자를 장려했으며 1960년대 이후 한국정부도 비슷한 방식의 산업화 전략을 구사했다. 총독부나 정부와의 유착이, 정부실력자들과의 관계가 사업성공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압축성장 과정에서 정부지원에 힘입어 대재벌그룹들이 부상하며 문어발식확장, 담합과 유착, 일감 몰아주기가 일상화되었다. 서구와 같이 시장 스스로 자율규제와 내부기율을 세우고 행사하는 전통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금융시장의 기업행위에 대한 감시감독 기능도 자리잡지 않았다. 과거 은행이 금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국유화 되어있을 때에는 정부가 기업행위의 감시감독 기능을 했다. 그러나 자본시장 자유화가 확대되고 재벌들이 소유하는 비은행금융기관들이 금융시장의 주역이 되면서 시장은 기업행위의 감시, 감독, 견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왔다.
시장과 자유가 결합하면 번영을 가져오기도 하고, 위기를 가져오기도 하고, 격차를 심화시키기도 한다. 이 결합이 균형을 취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시장 체제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또한 시장이라고 해서 다 똑 같은 시장이 아니다. 자율 규제와 감시 기능이 취약한 시장은 그것이 자라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능이 자리잡을 때까지 공공의 견제와 감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장은 약육강식의 장이 되며 시민들의 재산을 기득권 집단이 담합과 유착으로 편취해가는 불공정, 양극화를 조장하게 된다.
규제혁신은 상시적으로 해나가야 하나 규제완화 자체가 정부목표가 되면 기득권 세력의 로비에 포획되기 쉽다. 경제 체질 개선이 목표이나 실제로는 기존 체질의 고착화로 귀결되기도 한다. 규제혁신은 그만큼 어려운 과제다. 때로는 외국에 없는 규제라도 도입하고 일관되게 시행해 시장의 규율과 행위의 전통을 세워줄 필요가 있다. 하이에크는 자유시장선언서라고 할 수 있는 『노예의 길』에서 “경쟁이 유익한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체제를 계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크게 다르다”고 했다. 그는 경제정책을 하는 사람들에게 식물의 구조와 그 성격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 정원사의 태도를 강조했다. 지금 정책 당국이 유념해야 할 말이라 생각한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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