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완의 시선] 엉터리 공시가격에 허리 휘는 납세자
엄청난 과속으로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다. 잠시 후 정반대 방향으로 역주행한다. 그동안 운전자가 달라졌다. 두 번째 운전자는 “첫 번째 운전자의 과속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운전자는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맞선다. 도로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동산 세금을 두고 전 정부와 현 정부가 왔다 갔다 모습이 이런 운전자들과 많이 닮았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 23일 ‘공시가격 현실화 수정 계획’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의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내놨던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사실상 폐기했다. 원 장관은 “폐기는 아니다”라고 했지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현 정부가 전 정부의 정책을 거꾸로 뒤집은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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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값은 내렸는데 세금은 뜀박질
공시가격 제도 근본적 한계 노출
시차 문제 등 극복할 대안 찾아야
」
이번 발표에 따라 내년 부동산 공시가격은 많이 내린다. 일부 지역에선 공시가격 인하율이 역대 최고를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 부동산 종류에 따라 구체적인 발표 시기는 다르다. 아파트 등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내년 3월에 나온다.
역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시장 상황에 따라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그래도 부동산 세금에 대해선 기본 원칙이 있었다. ‘보유세 강화, 거래세 완화’였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선진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 부동산 보유세는 낮은 편이다. 그러니 보유세는 다소 올릴 필요가 있다. 대신 거래세는 낮춰 부동산 거래를 활성화하자.’ 2005년 노무현 정부가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할 때도 이런 논리를 내세웠다.
문재인 정부는 달랐다. ‘보유세 강화, 거래세 완화’의 원칙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집을 살 때도, 팔 때도, 보유할 때도 한결같이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다주택자에겐 “징벌적 세금을 물릴 테니 빨리 집을 팔라”고 엄포를 놨다. 이게 효과가 있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결국 집값도 못 잡고 인심만 잃었다.
정부가 세금을 올리려면 국회에서 법을 바꿔야 한다. 조세법률주의의 기본이다. 그런데 전 정부는 국회를 거치지 않고 세금을 올릴 편법을 찾았다. 공시가격의 대폭 인상이다. 세율은 제자리라도 공시가격을 올리면 납세자 부담은 커진다. 공시가격이 조세법률주의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변질했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 공시가격은 전년보다 19.9% 올렸다. 2007년 이후 14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인상했다. 올해 서울 공시가격 인상률은 14.2%였다. 전 정부 임기 5년간 한 해도 예외 없이 두 자릿수 인상률을 기록했다. 세종시 아파트 공시가격은 지난해 70% 넘게 올렸다가 올해는 4.6% 내렸다. 지난해 인상률 70%는 아무리 봐도 비정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공시가격을 매년 꾸준히 올리는 계획을 내놨다. 2030년에는 아파트 공시가격을 시세의 90%까지 올린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명목은 공시가격 ‘현실화’였지만 실상은 인상이었다. 원 장관은 “(전 정부의) 90%라는 현실화율 목표치는 시장 자체에 대한 무지 또는 무시”라고 지적했다. 부동산 시장의 작동 원리를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다.
현재 부동산 공시가격은 두 가지의 근본적 한계가 있다. 첫째는 시차의 문제다. 공시가격 기준일은 매년 1월 1일이다. 그런데 재산세는 7월과 9월, 종부세는 12월에 낸다. 특히 종부세에 대해선 1년 가까운 시차가 있다. 그동안 집값이 크게 올랐다면 납세자 반발이 덜할 수도 있다. 올해처럼 집값이 내렸을 때는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이미 일부 지역에선 시세가 공시가격 아래로 내려가는 역전 현상까지 발생했다.
둘째는 시세의 부정확성이다. 공시가격이 납세자 신뢰를 얻으려면 부동산 시세부터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공시가격을 시세의 60%로 하느냐, 70%로 하느냐는 그다음 문제다. 대단지 아파트라면 실거래 사례를 찾는 데 어려움이 덜할 것이다. 반면 소규모 단지나 빌라 등은 그렇지 않다. 주변 거래 사례를 참고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부정확한 시세로 공시가격을 정하고 그걸 근거로 세금을 매기니 납세자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기회에 공시가격 제도의 대수술이 필요해 보인다. 집값은 내려갔는데 세금까지 비싸게 물리는 걸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 예컨대 일정 수준 이상 집값이 내리면 중간에 공시가격을 재조정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시차 발생으로 인한 불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이다. 시세의 정확성을 높이려면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치밀한 사전 준비도 필수적이다. 내년에도 공시가격으로 진통을 겪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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