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통석의 염’과 ‘죄송한 마음’
지금은 상왕으로 물러앉은 아키히토 전 일왕은 1989년 즉위 때부터 한국에 오고 싶어 했다. 그런데 과거사가 발목을 잡았다. 해법을 모색하던 끝에 과거사에 대해 공식 사과하기로 한다. D데이는 1990년 일본을 국빈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을 환영하는 만찬 자리. 고르고 고른 끝에 그가 쓴 표현은 “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의 국민이 겪으셨던 고통을 생각하며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였다.
듣도 보도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아, 한자 뜻을 풀어 ‘애통하고 애석한 마음’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한국 정부는 ‘일왕의 공식 사죄’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국민 눈에는 사죄의 마음보다, 생소한 단어를 쓴 의도가 먼저 들어왔다. 얼마나 하기 싫었으면 굳이 저런 말을 골라 썼을까. 결국 일왕은 한국에 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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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자 위패 없는 분향소 논란
‘웃기고 있네’ 메모가 진심일까
수사는 답보, 국정조사도 혼선
」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다 돼간다. 참사 다음 날 내놓은 공식 담화는 “참담하다. 위로 드린다. 수습과 후속 조치 잘하겠다”로 요약된다.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 차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지난 4일 조계사에서 열린 추모법회에서 “대통령으로서 너무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 모두발언에선 “국민들께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어진 사과 표현은 첫 담화보다는 진전돼 보였다. 하지만 유족들 마음은 다른가 보다. 참사 후 3주가 지난 2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내건 요구사항 여섯 가지 중 첫째가 ‘진정성 있는 사과’이니 말이다.
보통 사과할 때는 “정말 미안하다”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담백하게 말한다. 그런데 “나의 마음은 죄송한 것”이라고 한 표현은 사과인지 설명인지 아리송하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의 언어와 평범한 시민의 용어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사과하는 주체와 잘못의 인정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게 빠지면 표현이 아무리 유려해도 의도를 의심받는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는 의심받을 일을 계속해왔다. 우선 용어 논쟁. 정부는 굳이 참사 대신 사고로,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는 용어를 고집했다. 잘못의 주체를 흐리는 표현이다. 다음은 영정 논란. 정부나 지자체가 마련한 합동분향소에 위패와 영정을 쓰지 못 하게 했다. 그래서 서울광장에 설치된 정부 공식 분향소에는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신위(神位)’라고 쓴 공동 위패가 놓였다. 국화꽃 빼곡한 분향소는 외관은 화려했지만, 주인 없는 집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영문도 모른 채 유명을 달리한 156명의 영혼은 가는 길 배웅마저 익명에 뭉뚱그려져 받아야 했다. 그래야 할 합당한 이유를 정부도 대지 못했다.
급기야 한 인터넷 매체가 유족 동의 없이 이름을 공개했다. 정부와 여당은 “동의 없는 명단공개는 2차 가해”라며 흥분했다. 그런데 22일 회견에 참여한 유족은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동의 없는 명단공개가 2차 가해지만, 그 전에 저의 동의 없이 위패 없고 영정 사진 없는 분향소를 봤을 때 저에겐 그 또한 2차 가해였다.”
김은혜·강승규 수석은 국정감사장에서 참사 책임을 묻는 야당 의원 질의 시간에 ‘웃기고 있네’라는 메모를 했다. 이게 그들의 진심일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다. 그런데 대통령실과 여당에선 그들을 쫓아냈다며 여당 소속 위원장에게 되레 성을 냈다. 초록은 동색인가.
하이라이트는 대통령 자신이다. 국가애도기간이 끝난 뒤 동남아 순방에 오르면서 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 불허했다. 누가 봐도 지난 9월 뉴욕 순방 때 ‘비속어-날리면’ 논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보복이다. 시민들은 아직 슬프고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데, 언론탄압 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대형 이슈를 투척한 것이다. 순방에서 돌아와서는 ‘출근길 약식 회견(도어 스테핑) 중단’을 선언했다.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는 생각일까. 들고 나는 길에 이상민 장관을 격려했다. 그는 재해를 예방·관리해야 하는 주무 장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 퇴진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대통령의 의중이 어디로 향하는지 가늠된다.
죄송이든 유감이든 통석이든 진실한 마음만 있다면 사람들이 몰라줄 리 없다. 하지만 참사 후 대통령과 정부 모습은 “내 책임 아니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의도만 읽힌다. 진상을 규명한다며 벌이는 경찰의 셀프 수사가 산으로 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야가 어렵게 합의한 국정조사도 여당의 ‘침대 축구’로 답답함만 더할 것이란 우려가 벌써 나온다.
최현철 사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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