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기다린거야?" 막내딸의 눈물…그제야 엄마 심장은 멈췄다 [김은혜의 살아내다]

김은혜 입력 2022. 11. 25. 00:02 수정 2023. 5. 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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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임종을 앞둔 환자 곁을 지키다 보면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종종 겪곤 한다. 하늘에서,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 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준 것, 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일들 말이다. 혹자는 간절함이 이뤄 낸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폐암 환자가 있었다. 60대 후반이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우리 병원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의식이 없었다. 한방병원 암 병동을 찾는 암 환자는 이 환자처럼 더이상 손쓰기 어려운 마지막 단계에 보통 이곳에 온다. 보호자들은 미리 작성해둔 연명치료중단동의서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어머니가 고통 없이 가실 수 있도록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는 세 아들을 앞에 앉혀 두고 의학적 예후를 설명하자 모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을 넘기기 힘드실 것"이라는 말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가족은 남은 과정을 존엄하게 준비하며 어머니를 잘 보살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긴 대화 끝에 자리를 마무리하려 하자 큰아들로 보이는 보호자가 주춤하며 내 가운을 붙잡고 말했다.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미리 알려주실 수 있나요?”

지금 외국에 있는 막내 여동생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는 물론 임종 날짜를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건 경험상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전에 어느 병원 응급실에 갔을 때도, 연명치료중단동의서를 작성하기 전 또 다른 병원의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그리고 우리 병원으로 옮기기 바로 전날에도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거나 "이번 주를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막내는 급하게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환자는 그 고비를 넘겼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오갔더니 직장 다니는 막내가 쓸 수 있는 연차가 이제 일주일 남짓만 남아 있다고 했다.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르고 입출국을 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일주일도 빠듯했기에 막내가 최대한 빨리 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막내는 아들만 셋이었던 집안에 늦둥이로 태어난 딸이었다.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서 해외에 쭉 사는 터라 유독 더 애틋한 동생이라고 덧붙였다.

한 사람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끝이지만 남은 이들에게는 그 부재를 견디고 일상에 적응해나가는 단련의 연속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냈으니까. 그렇기에 저 부탁을 들었을 때 받은 압박감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말로는 "월 단위, 최대한 주 단위 정도로는 말씀드릴 수 있지만 구체적 날짜를 지정할 수는 없다, 죄송하다"고 했지만 그 날부터 나는 매일 기도했다. 저 가족이 온전히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도록 제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환자는 오랜 기간 와식생활을 해와서인지 상태가 하루하루 달랐다. 어느 날은 범상치 않게 안 좋아졌다가 다른 날은 갑자기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암 환자의 생체징후를 보다 보면 ‘오늘’ 돌아가실 것 같다는 예감이 맞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이전 병원에서도 거듭 임종 날짜를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 거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에도 몇 번이고 환자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매일같이 서로 교대로 의식 없는 어머니를 찾아와, 듣고 계실지 모를 일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세 아들의 모습을 보니 그런 노력을 더욱이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실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소름이 확 돋는 기분이 들었다. 환자 주변의 공기와 냄새가 변한 것처럼 느껴졌고 무엇보다 안색이 다르게 보였다. 그 이상한 변화를 동료들에게 묻자 “오늘 그 병실 전등 하나가 나가서 그런 거 아니야?”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진 채 보호자에게 전화했고 큰아들은 전화를 받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어머니 지금 안 좋으세요?”

나중에 들어보니 그 날 먼저 가신 아버지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꿈을 꾼 막냇동생이 오빠들에게 전화했고,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내가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내 전화를 기점으로 나와 보호자들은 임종 준비를 시작했다. 막내딸도 바로 한국으로 출발했다. 사실 생체징후 상으로는 평소와 비슷한 정도였는데 왜인지 모르게 이번에는 저절로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환자의 옆을 계속 지켰다.

겨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밤, 환자의 혈압이 잡히지 않기 시작했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첫 징후였다. 따님 도착시각을 물었더니 13시간도 뒤라고 했다. 결국 나는 이 가족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느끼며 "그때까지 버티기는 힘들 것 같다"고 보호자들에게 고했다. 그들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수긍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심전도에서 아무것도 측정되지 않는 걸 확인하고 환자 몸에 부착되어 있던 기계들을 떼어 내며 사망선고를 하려고 했다. “2021년….”

프랑스 작가 펠릭스-조제프 바리아스의 '쇼팽의 죽음'(1885)의 한 부분.

연도를 시작으로 운을 떼려던 그때, 갑자기 환자가 크게 들숨을 쉬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는 너무 놀라 펄쩍 뛰며 손에 쥐고 있던 기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급하게 다시 확인해보았지만 잠깐 심장이 멈췄던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심전도에 다시 작은 그래프가 찍히기 시작했고 호흡도 1분에 1번꼴로 큰 들숨을 쉬고 있었다. 몇 시간 뒤 "심전도 상에 그래프가 멈췄다"는 콜을 받고 다시 찾아갔을 때도 너무 미약한 반응에 기계가 측정을 못 하고 있었을 뿐 환자는 여전히 아주 가끔 숨을 쉬고 있었다. 이때부터 모든 기계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의료진이 교대로 상주하면서 호흡을 체크하며 임종을 판단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 환자는 병실로 뛰쳐 들어온 딸이 울면서 “엄마, 날 기다린 거야?”라고 말하며 끌어안았을 때, 당신의 두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호흡을 멈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의료진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을 삼켰다.

이 모든 상황은 의학적으로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혹자는 우연이라 할 것이고 혹자는 간절함이 준 선물이라 할지 모른다. 무엇이든 간에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생각지 못한 순간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기 위함이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간절함을 잃지 않는다면 누군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살아내길 희망한다.

김은혜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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