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2년 뒤 달력, '이순신 전사 장면'을 표지로 붙인 류성룡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한 '유성용 달력'이 일본에서 발견돼 국내로 돌아왔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인 소장자로부터 사들여 24일 공개한 '유성룡비망기입대통력-경자'(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庚子)다. 대통력은 월일·절기를 적은 책력(冊曆)이다. 금속활자로 찍은, 오늘날 달력이다. 이순신 장군과 한양 건천동(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유년기를 같이 보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이 끝난 2년 뒤인 1600년(경자년)에 사용하고 기록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A4 용지보다 조금 긴 가로·세로 20✕30㎝ 크기, 표지를 포함해 16장 분량이다.
유성룡은 대통력의 여백에 빼곡히 메모를 적었다. 비가 왔다, 매우 더웠다, 밤에 꿈이 번거로웠다, 국화를 땄다, 모친이 변비를 앓았다…. 날짜별로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했다.
이순신 최후에 관한 기록은 대통력의 표지에 적혀 있다. 원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색 표지 대신 덧붙여 가철된 종이에 흘림체로 83자가 적혀 있다. "전쟁하는 날에 직접 시석(矢石)을 무릅쓰자, 부장(副將)들이 진두지휘하는 것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는 문장도 있다. '시석'은 화살과 돌을 뜻한다. 직접 전투지휘에 나선 이순신을 부하들이 말리는 장면이 선하다. 이어지는 문장이 결정적이다. "직접 출전하여 전쟁을 독려하다가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아아!" 마지막의 감탄사 '아아'의 한자어는 안타까움을 뜻하는 '오호(嗚呼)'로 표기돼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자(字·성인이 되면 받는 새 이름)인 '여해(汝諧)'가 적혀 있어 '대장'이 이순신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연구소장은 "이순신 장군이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에도 나오지만, 출정 전에 부하들이 대장을 만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처음 보는 내용"이라고 평했다. 또 "이순신의 전사는 유성룡에게 큰 사건이었고, 경자년 내내 대통력을 꺼내볼 때마다 보는 표지에 철해둘 정도의 의미였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덧붙였다.
대통력에는 이밖에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1567∼1618)이 포로 생활을 마치고 1600년 돌아온 일 등 당대 상황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특히 다른 대통력에는 없는 '술 제조법'이 10차례나 등장한다. '구급(救急)주 만드는 법', '나쁜 기운을 다스리는 술 만드는 법' 등 특정 효과를 위해 만드는 술 제조법도 적었고, '술에서 깨는 법'이라며 '술에 취한 뒤 칡넝쿨 한 줄기를 차처럼 짙게 달여서 복용하면 쉽게 술을 깬다'고 적기도 했다.
대통력은 김문경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가, 한 일본인 소장자가 2년 전 경매에서 사들인 사실을 지난 5월 문화재청과 문화재재단에 알리면서 존재가 확인됐다. 해외 유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재단 측은 노승석 소장에게 자료 번역을 맡겼고, 두 달간 내용 검토 끝에 이순신 관련 기록임을 확인한 다음 3차례의 평가위원회를 거쳐 사들였다. 구입 금액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복권기금을 활용했다고 밝혔다.
'유성룡 종가 문적(柳成龍 宗家 文籍)'은 보물로 지정된 대통력 6책을 포함해 총 8책이 전해지지만, 경자년 기록은 새로운 것이다. 유성룡의 15대 주손 류창해씨는 이날 언론공개회에 참가해 "서애 선생의 술 제조법 기록은 다른 문서에서 보지 못했다"며 "자손 입장에서도 (이번 경자년 대통력이) 대단히 귀중하게 느껴진다"고 밝혔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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