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나무를 뚫는 딱따구리처럼. 계속 나아가는 여성 창업가들

이마루 2022. 11. 24. 15: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까르띠에 언더우먼 임팩트 커뮤니티가 여성 창업가들과 함께하는 이유

나무를 뚫는 딱따구리처럼

나는 아이가 없는 30대 기혼 여성이다. 그리고 나는 유아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처음 문제를 인식한 건 조카와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였다. 5살짜리 조카가 보던 프로는 어린이들의 대통령이라 불리우는 인기 애니메이션이었다. 영유아 콘텐츠에 큰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막연히 내가 어렸을 때 흔히 보았던, 긴 머리를 흩날리고, 불편한 하이힐을 신은 채 악당을 물리치는 여성 캐릭터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카와 함께 보게 된 영유아 애니메이션은 무려 30여년 전에 보던 모습과 크게 달라진게 없었다. 훨씬 세련된 화풍과 선명한 색감, 3D 애니메이션이지만 캐릭터와 스토리에서 찾아볼 수 있던 구시대적 관념은 그대로였다. 나는 정말 크게 놀랐다. 유엔이 아동권리협약에서 아동이 성평등하게 배우고 자라며, 차별로부터 보호 받아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 1989년이다. 그후로 몇 십년이 흘렀는데 어린이들은 여전히 고정관념으로 가득한 내용의 콘텐츠를 보고 자라고 있었다.

어린이는 책과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를 통해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간접적으로 배운다. 그렇기에 영유아 콘텐츠는 어린이가 자라면서 마주할만한 다양한 상황에서, 어린이가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타인에게 공감하고 약자를 배려하도록 돕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 문득 세계 시민적 소양이 익숙하고, 가치중심적 소비를 하는데에 앞장서는 밀레니얼 세대 ‘양육자’는 지금의 유아 콘텐츠의 현실에 굉장히 불만족스러워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의 소비자 조사 끝에 나의 가설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 참여한 밀레니얼 세대 양육자 중에는 전래동화를 읽어주고 싶지 않아 아예 구매하지 않은 사람, 본인이 어릴적 좋아하던 디즈니의 공주 그림책들을 구매하고선 자녀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아 숨겨둔 사람, 출판사나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는 사람 등이 있었다. 그림책을 성평등 기준으로 검수하여 매달 가정으로 보내드리는 ‘성평등 그림책 큐레이션 서비스 우따따 북클럽’을 시작했다. 큐레이션을 하다보니 검수의 기준이 필요해서 다른 나라의 어린이 콘텐츠 제작 가이드라인을 참고하여 가이드라인도 개발했다. 그러다가 큐레이션 할 콘텐츠가 도저히 없으면 직접 만들기도 하던 것이, 회사 딱따구리 의 탄생이다.

우따따 북클럽은 열심히 성장했다. 어린이가 그림책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워크북과 양육자나 교사가 해당 책을 보고 나눌 수 있는 대화 가이드와 놀이 가이드를 제작해 큐레이션 한 그림책과 함께 제공했다. 지난 3년 간 그림책 큐레이션으로 만든 매출은 약 2.5억, 워크북과 가이드북으로 교재 제작 능력을 인정 받아 여성가족부, 교육청, 세이브더칠드런 등과 함께 교재 등을 제작하며 만든 매출이 2억 원이며, 누적 큐레이션 횟수가 3,000회를 넘어섰다. 유치원과 도서관, 학교에서도 우리 서비스를 찾았고, 교육 효과도 높았다. 출판사에서 먼저 찾아와 홍보비를 줄테니 큐레이션 목록에 넣어줄 것을 요청하거나, 우따따 북클럽에 선정된 도서 표지에 딱따구리 로고를 넣길 바랐다.

나는 우따따 북클럽을 더 큰 서비스로 확대하고 싶었다. 지금보다 더 저렴한 금액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큐레이션 서비스를 받아보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구시대적 관념을 가진 콘텐츠들은 경쟁에서 탈락할테다. 이렇게 시장의 언어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기에 투자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가 한결같이 ‘확장 가능성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코로나로 인한 경기 침체가 조금씩 피부로 와닿고 있었고, 회사는 창업 이래 처음으로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더 투자에 매달렸고, 이 과정은 무척 지난했다. 무례한 지적이나 질문을 받기도 했다. ‘대표님은 아이가 없는데 왜 유아교육 사업을 하세요? 진정성이 떨어져요’ 같은. 그런데 스타트업 생태계를 보면 전문 영역이 아닌 분야의 창업가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배달의 민족 대표는 디자이너, 토스 대표는 치과 의사 출신이며 오호라 대표는 네일팁 한 번 붙여보지 않았을 남성이다. 저 투자자는 앞서 나열한 서비스의 대표들에게도 배달업이나 금융업, 미용업에 대한 ‘진정성’을 운운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이가 없다고 하여, 한 명의 어른으로서 어린이가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책임도 없는 것이 아닌데, 나에게 아이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오랜 시간 여성 창업자들을 응원해온 까르띠에 여성 창업 이니셔티브는 이런 고민을 가진 여성들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 ‘언더우먼 임팩트 커뮤니티’를 운영 중이다. 얼마전 2기를 모집한 이 커뮤니티를 통해 다른 여성 창업가분들을 소개 받을 기회가 있었다. 서로 속한 비지니스 영역은 달랐지만, 사업을 영위하고 투자를 유치하는 등의 과정에서 겪는 경험의 결이 비슷했다. 여성 창업가들은 쉽게 전문성과 진정성을 의심 받았고, 자주 비지니스를 운영할 능력과 지속가능성을 부정 당했다. 우리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연락하며 서로의 소소한 성과를 성대히 축하해주고, 시덥잖게 입을 대며 무례한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로부터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었다. 이건 그동안 내가 속했던 다른 그룹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동지애, 전우애 같은 거였다. 하루는 ‘현재로서는 투자 가능성이 낮다’는 심사역의 피드백을 듣고 크게 상심해 있었다. 우따따 북클럽 덕분에 고정관념이 강했던 아이가 많이 변했다고 감사하다는 메세지를 받거나 덕분에 유아 교육계가 많이 변하고 있다며 늘 응원한다는 선생님의 손편지를 받으며 무럭무럭 커졌던 긍지와 자긍심이 잘근잘근 밟혀 납작해졌었다. 사업을 계속 하는게 맞나? 하며 스스로를 의심하고, 심사역이 말한 대로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하며 땅굴을 파고 있을 때 쯤, 가까운 여성 창업가 한 분이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대표님, 우리는 투자자에게 잘보이려고 사업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냥 사업으로 증명해요.”너무도 당연한 이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렇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비전과 미션이 있었지. 우린 그걸 만들고 바꾸고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고군분투 하고 있는거지. 우리가 깨려는 벽이 만들어진 세월에 비하면 우리가 겪은 어려움은 새발의 피도 되지 않을테지. 그제야 내가 너무 하나에 매몰되어 주위 다른 것들을 돌보고 있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차례의 피봇을 거친 딱따구리는 지난 7월 법인 설립을 마치고, 내년에는 기존에 사람이 직접하던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를 알고리즘 기반의 기술로 개발한 어플리케이션 서비스를 런칭할 계획을 하고 있다. 소비자가 자녀의 개인 데이터를 입력하면 우리가 개발한 알고리즘에 따라 맞춤형 유아 콘텐츠를 추천해주며, 구시대적 관념을 가진 콘텐츠는 알로리즘에 적게 노출되는 방식이다. 여전히 투자는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속도를 줄이면 될테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테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증명해 낼 수만 있다면 문제 될 것은 없다.

딱따구리는 딱딱한 나무를 뚫어 안락한 둥지를 만드는 딱따구리처럼 단단한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뚫고 어린이에게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주자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서비스명 우따따는 딱따구리가 나무를 뚫는 소리다. 함께 이렇게 계속 두드리다 보면 제 아무리 단단한 나무도 속을 내어줄거라 믿는다. 서로 방식은 다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나무를 뚫는 수많은 여성 창업가들을 응원한다. 우리가 나무를 뚫어 만들고 싶은 둥지는 어린이가 살아갈 세상이자, 내가 살아갈 세상이다.

유지은스토리텔링 기업 윙토리와 여성 생활용품 기업 끌리를 창업했다. 2019년부터 유아동 콘텐츠 큐레이션 기업 ‘딱따구리’의 대표로 이야기와 여성, 아동의 삶을 잇고 있다.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비상임 이사로도 활약 중이다.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