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봉사만 5천 명... 양복 입은 노신사도 감자를 깎는 이유 [전명윤의 타인의 식탁]

전명윤 입력 2022. 11. 23. 17:57 수정 2023. 1. 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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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식탁] 시크교 사원의 구루 카 랑가르

'타인의 식탁'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음식을 소재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전명윤 기자]

▲ 2006년(좌)과 2020년(우)의 암리차르 역 풍경.  인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이야말로 전형적인 외부인의 시선이다.
ⓒ 전명윤
 
암리차르 역에 도착했다. 5년 만의 재방문이다. 그사이 역사는 페인트칠을 새로 해 훨씬 산뜻해졌다. 역 광장으로 나갔다. 암리차르 시내를 가득 메우던 사이클 릭샤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오면 일부러 시크교도가 운전하는 사이클 릭샤를 탄다. 사회적 도덕률이 전무하다시피 한 힌두교와 달리 시크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만든 사회적 제약이 많다. 기껏해야 '거짓말하지 마라' , '정직해라' 정도의 흔한 말이지만 이런 도덕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생각 외로 크다. 

게다가 시크교도 운전사들은 자신들의 성지에 온 순례객들에게 어지간해서는 부당요금을 징수하려 하지 않는다. 인도 인구에서 3% 내외인 시크교도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성지에서는 최대한 선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 시대의 변화에 밀려 사이클 릭샤는 도태되고 있다. 한때 사람이 끄는 이 교통 수단에 탑승하는 게 비인간적인 게 아니냐는 논쟁이 여행자들 사이에 있었다. 시대가 바뀌어 사이클 릭샤가 도태되게 된 건 맞는데 그 변화가 누군가의 양심은 아니다. 우리는 혁명도 자본가가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 전명윤
 
하지만 이런 여행 팁은 소용없어졌다. 이제는 모두 인도의 우버 격인 '울라'를 이용해 택시나 오토 릭샤를 호출하고 역 광장에는 울라 이용객을 위한 별도의 스탠드가 마련되어 있다. 

오지 않을 구시대의 유물인 사이클 릭샤를 기다리며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내가 사실 인도인이고 저들이 인도 바깥 어느 문명에서 온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10여 분쯤 기다렸지만 사이클 릭샤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탄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두 역을 빠져나갈 즈음에야 나는 울라 앱을 켰다. 황금사원의 이름을 목적지로 입력하자 곧바로 오토 릭샤 한 대가 잡혔다. 

기사는 내 기대와 달리 힌두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차이니즈? 코리안?"이라고 물었고 나는 "코리안"이라고 답했다. 그가 차이나와 코리아를 딱히 다른 나라라 구분할 것 같지 않았지만 어쨌건 아니라는 대답에 안심이 됐는지 그는 어두운 거리를 내달려 금세 어느 길가에 내려주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못 들어가. 노 엔트리."

이럴 때는 늘 의심부터 하는 편이지만 너무나도 확연한 보행자 전용 거리가 펼쳐진 탓에 돈을 지불하고 내려야만 했다. 요즘 인도는 주요 관광지 주변에 보행자 거리를 만드는 게 일종의 붐이다. 딱 20년 전 중국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중국은 여기저기 도시마다 보행자 전용도로가 생겨났다. 구글 맵을 열어보니 목적지인 황금사원에서 딱 세 블록 전. 걸으면 15분쯤 걸리는 거리다. 보행자 전용도로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노면 상태가 좋았다. 

앞서 말했듯 구루 나나크는 깨닫고 나서 15년간 인도 전역, 저 멀리 스리랑카와 티베트, 오늘날 이라크 바그다드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까지 순례 여행을 했다. 요즘이야 순례객도 자기 돈 내고 먹고 사는 게 상식이지만 그때만 해도 순례객은 탁발과 걸식에 의존해 여행을 이어갔다. 시크교 전승에 의하면 구루 나나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설법을 들었고 그는 어렵지 않게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교조의 무상 여행에 대한 보답일까? 시크교 교단은 사원을 찾은 모든 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 내가 누굴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구루 나나크는 '엑 온카르', 즉 하나의 신을 강조했지만 그 신의 이름이 제각각인 것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하나의 진리라는 말로 그가 말하는 신이 힌두와 이슬람과 달리 인격신이 아님을 설파했다. 
 
 요즘은 순례객들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 전명윤
 
 
 황금사원 안에서는 터번을 쓴 시크교도와 두건을 쓴 비 시크교도를 손쉽게 볼 수 있다.
ⓒ 전명윤
 

그러다 보니 시크교 사원은 타 종교인이 방문해도 시크교도와 동등하게 대한다. 사원에서 지켜야 할 유일한 의무는 그들의 교리대로 머리카락만 가리면 되며 사원 앞에서는 이런 교리조차 모르고 무작정 방문한 타 종교인을 위해 두건을 무료로 빌려준다. 사원 안에서 어떤 신에게 기도하는지는 전적으로 그의 자유다. 물론 한국의 일부 선교사처럼 그 안에서 찬송가를 부른다면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외국인 순례객은 황금사원 동남쪽에 있는 스리 구루 람 다스 니와스(Shri Guru Ram Das Niwas)라는 곳에서 재워준다. 에어컨이 나오는 공동 침실 형식인데 입구에 있는 담당 매니저를 만나 숙박부에 기재만 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계속 머무는 얌체들이 많은지 3일 이상의 연박은 금지된다.

2019년 2월 코로나로 전 세계가 뒤숭숭해지고 해외여행이 슬슬 자제의 길로 들어서던 시점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이제 배낭 여행자들도 이런 무료 숙실보다는 번듯한 곳에서 머무는 추세로 바뀌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숙소에는 고작 네 명의 외국인만 머물고 있었다. 2월 최저 기온 9도를 찍은 날씨라 복작대는 사람들의 열기로나마 잠을 청하길 바랐건만 숙소 안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외국인 전용 무료 숙소인 '스리 구루 람 다스 니와스' 입구
ⓒ 전명윤
 
▲ 스리 구루 람다스 니와스의 내부 종종 빈대가 나오기도 하지만 배낭 여행자에게 이만한 선물도 없다.
ⓒ 전명윤
인도를 다닌 지 25년째 접어들지만 갈 때마다 새롭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도뿐만 아니라 모든 여행지가 그렇다. 첫 여행 때는 비교 대상이 없다 보니 모든 게 새롭다. 두 번째는 풍경이 익숙하다 보니 디테일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궁금증이 생긴다. 이 궁금증은 대부분 현지에서보다는 귀국해 관련 서적을 뒤지면서 해소하게 된다.
그리고 그 궁금증이 해소되면 그걸 다시 확인하러 가고 그곳에서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 의문은 역사나 문화에 한정되지 않는다. '왜 이 동네는 다른 지역과 달리 요리에 이런 향신료를 넣을까'와 같은 궁금증이 피어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알면 알수록 궁금증도 그만큼의 크기로 솟아난다는 점이다.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나지 않는다. 
 
 석양 무렵의 황금사원
ⓒ 전명윤
 
황금사원의 진풍경

2020년 2월 암리차르를 다시 찾은 이유는 알면 알수록 궁금증이 더해가는 시크교 그리고 황금사원의 무료 식당 구루 카 랑가르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시크교는 사원을 찾은 낯선 이들에게 무료로 숙소와 식사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그저 한국의 수많은 교회가 일요일 예배가 끝난 후 신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교를 위한 활동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식사가 카스트에 저항하고자 하는 지극히 인도다운 투쟁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이 모든 의식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황금사원 안에서 동남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문에 거의 다다라서 갑자기 풍경이 바뀐다. 그전까지 신성함만을 뽐내던 사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모두가 둘러앉아 양파 까고 감자 깎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아낙들도 많지만 종종 양복 정장을 차려입은 수염이 성성한 사내들도 잔뜩 끼어있다.

이들은 매일 점심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구루 카 랑가르에서 식사 봉사하기 위해 전국에서 달려온 5000명가량의 자원봉사자들이다. 매일같이 5000명을 어찌 구하나 싶지만 구루 카 랑가르의 자원봉사는 경쟁률이 높기 때문에 항상 대기 순번이 있었으면 있었지 인원이 부족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장 많은 자원 봉사자가 필요한 영역은 식재료 다듬기와 설거지 쪽이다. 감자와 양파만을 전문적으로 까고 써는 무리가 지나면 이번에는 '우당탕탕'과 '달그락달그락'이 섞인 굉음이 주위를 진동하는데 여기는 설거지 봉사자들이 몰려있는 곳이다. 
 
 구루 카 랑가르에서 야채를 다듬는 자원봉사자들
ⓒ 전명윤
 
 순례 온 가족 전원이 모여 앉아 마늘 까는 풍경. 시크교의 주방에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없다.
ⓒ 전명윤
 
구루 카 랑가르에서 밥을 먹으려면 재료 다듬기가 끝나고 설거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한다. 좁은 통로의 중간쯤에서 봉사자가 식판을 나눠준다. 방금 설거지가 끝나 윤이 반들반들 나는 스테인리스 식판은 인도에서 본 그 어떤 식기보다 세척 상태가 훌륭했다. 식판을 얻은 뒤에는 거대한 군중 행렬을 따라가면 된다. 중간중간 일단 멈춤과 직진만을 지시하는 봉사자가 나와 군중들의 행렬을 통제한다.
식당은 거대한 홀이다. 천여 명까지도 들어갈 법한 거대한 홀에는 사람이 앉는 구역이 있는데 여기에 두꺼운 마직물을 깔아놨다. 적당한 간격에 따라 일렬로 앉으면 식사가 배급된다. 상차림은 소박하기 그지없어 감자와 양파로 만든 약간은 싱거운 맛의 카레와 렌틸콩으로 만든 '달'이라 불리는 스튜 그리고 인도 서민들의 주식인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뻣뻣한 빵 '로띠'가 나온다. 
 
 식판 배급소
ⓒ 전명윤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음식이 군대 배식처럼 한 번에 나오지는 않는다. 카레를 주는 사람이 한차례 돌면 그다음에 로띠를 주는 사람이 뒤따라온다. 내가 앉은 홀은 800명가량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이 엄청난 광경을 촬영하기 위해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한 손으로 로띠를 받다가 봉사자에게 혼났다. 음식, 특히 주식인 빵을 받을 때는 반드시 두 손으로 받아 들어야 한다.
인도에서는 기본적으로 오른손과 왼손을 차별하고 음식은 오른손으로 받는 게 상례다. 그런데 여기 와보니 그것도 힌두의 풍습일 뿐이었다. 하긴 카스트를 없앤다고 수 백년째 온갖 노력을 하는 이 종파에서 오른손만으로 음식을 받는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긴 했다. 홀에는 나 같은 외국인도 있었고, 터번을 정식으로 두른 시크도 있었고, 힌두교도인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1938년 생이라는 아칼 싱 할아버지는 이번이 생애 마지막 순례인 것 같다고 말했다.
ⓒ 전명윤
 
시크교도의 무기

여기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무굴 제국의 3대 황제인 악바르는 인근의 대도시 라호르를 방문하던 길에 시크 사원에 들러 랑가르에서 시크교도들과 함께 식사했다. 비록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종교적 편견이 없었던 황제 악바르는 계급과 신분을 초월해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다는 신흥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구루 또한 황제라고 특별 대접을 하지 않았다. 

제국의 단합을 위해 힌두 공주와의 결혼을 꺼리지 않았고, 힌두 공주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후계를 이은 악바르에게 시크교의 이런 모습은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종교 간 화합의 모범이었다. 아울러 신의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하지 않는 인도를 함께 건설할 동반자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

랑가르의 식사는 무료였지만 황제는 보답했다. 황제는 식사 자리에서 당시 시크교의 지도자였던 구루 아마르 다스의 딸이 곧 결혼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결혼 선물로 땅을 주는데 그 땅이 바로 이곳 황금사원이 있는 자리다. 

식사를 얼추 다 마칠 때쯤 물과 후식을 한번씩 더 배급해줬다. 후식은 우유와 설탕에 쌀을 넣고 끓인 달달한 타락죽 같은 키르(Kheer)였다. 수저가 없는 식사다 보니 키르를 손으로 훑어 입에 털어넣었다. 외국인치고는 인도식 맨손 식사를 꽤 잘한다고 자부했지만 손가락만으로 마치 핥아먹은 것처럼 카레 국물 하나 남기지 않는 이들의 손놀림은 볼 때마다 감탄사를 자아낸다. 밥을 다 먹은 사람은 꾸준히 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는 꾸준히 새로운 사람들이 채웠다. 
  
 로띠를 굽는 화덕 파트
ⓒ 전명윤
 
 구루 카 랑가르는 식사할 수 있는 여러 개의 홀이 모여있는 건물이다.
ⓒ 전명윤
 
밥을 다 먹고 일어나는 길. 카메라를 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구루 카 랑가르의 이곳저곳을 양해하에 둘러볼 수 있었다. 2층에는 공동 화덕이 여러 개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화덕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한쪽에선 열심히 로띠 반죽을 펴고 있었다. 

시크교에서는 이런 봉사를 세와(Sewa)라고 하는데 황금사원에서 벌이는 세와는 시크교도들에게 꽤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다 보니 잘 차려입은 노신사까지 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감자 깎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세와를 통해 공동체에 밥을 나누는 방법과 요리를 배운다. 화덕에는 한 할머니가 어린 손주 셋에게 로띠 반죽을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넓게 펴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봉사는 이렇게 교육으로 이어졌다. 카스트에 저항하는 시크교도들의 의지는 대를 물려가며 전수되고 있었다. 

시크교 교단의 발표에 의하면 구루 카 랑가르에서는 평일 기준 매일 5톤의 밀과 2톤의 렌틸콩, 1.5톤의 쌀 그리고 700㎏의 우유를 소비한다고 한다.

2층의 화덕과 또 다른 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자 다시 설거지 영역에서 들려오는 쇳소리와 겨울 한낮의 환한 빛이 동시에 나를 맞이했다. 천천히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양복을 입은 노신사는 그새 양파 자르기로 임무가 바뀌었는지 소매로 연신 눈을 훔치며 양파를 까고 있었다. 

그 눈물 뒤의 터번과 긴 수염으로 상징되는 시크교도들 하나하나가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전사들로 보였다. 신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기에 사람 사이도 서로 평등해야 한다고 구루 나나크는 설파했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시크교라는 종교는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카스트와 맞서 싸우는 중이다. 그들의 무기는 총이나 칼이 아니라 도마와 요리용 칼, 화덕과 밀가루와 우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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