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21세기 한국인의 영혼을 '부드럽게' 잠식한다

김상목 2022. 11. 2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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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픽션들>

[김상목 기자]

 영화 <픽션들> 포스터 이미지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가끔 골목길을 걷다 보면 모퉁이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기운을 뿜는 뜻밖의 영화들을 만나곤 한다. 개별 작품에 대한 호불호, 찬반양론을 떠나 공통적으로 낯설고 기이한 느낌을 던지는 그런 영화들이다. 어떤 영화는 잊을 만하면 두고두고 생각나기도 한다. 영화 줄거리 전체가 떠오르기보단 그 영화에 관련된 어떤 이미지나 응어리 같은 것이 호출되는 식이다. 물론 그중 다수는 그저 기묘한 찰나로 시간의 경과에 풍화되어 버리곤 한다. 하지만 말끔하게 잘 뽑아져 나오는 기성품 같은 영화들보다는 오히려 이런 기행종이 반가울 때가 종종 있다.

<픽션들>이 과연 시간이 지난 뒤 어떤 인상으로 남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는 명백히 전자에 속하는 부류다. 즉 인물과 배경이 차례로 소개되고 사건과 갈등이 불거졌다가 폭발한 뒤 해소되고 영화가 끝난 후의 상황이 고착되는 명백한 결말을 기대할 수 없다. 그 대신에 낯섬과 파격, 혹은 난해함과 기괴함을 선물해줄 그런 부류에 속하는 영화다.

별다른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쭉 보았다. 영화에 관련된 소개 자료를 대강 보기는 했지만 뚜렷하게 연결되진 않았다. 주연배우 사인방은 독립영화를 평소에 챙겨보던 이들이라면 얼굴이 낯설지 않은 이들이라 반가운 마음이 드는 정도였다. 영화는 단막극처럼 여러 개로 구획되어 있었고 전반부에선 엄격하게 캐릭터가 구분되다 후반부로 갈수록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모호함과 흥미를 동시에 유발하는 방식을 택했다. '아방가르드 시네마'라 자처하듯 그런 전개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전통적인 익숙한 서사를 대할 때처럼 적당히 느슨하게 무임승차하는 태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예측불가 상황을 조성한다.

관객은 이제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다. 이 생경한 이야기에 평소와 다른 긴장감으로 끝까지 임하거나, 혹은 짜증을 내며 궤도에서 내리거나 둘 중 하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기존에 우리가 입맛대로 골라먹던 영화의 스타일과는 꽤나 차이가 나는 작업이다.

4인4색, 불안을 받아들이는 배우의 표정(들)
 
 영화 <픽션들> 스틸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4명의 배우들은 초반에는 2대 2 복식조처럼 차례로 등장한다.

윤수는 작가지망생이다. 그는 치매에 걸린 노모와 사실상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운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 주변조건 때문에 평범한 가족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집안일과 집필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고 과외를 통해 생활비를 벌면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 가족들의 상황은 개선과는 거리가 멀다. 어머니의 치매는 점점 심해지고 동생과의 단절은 점점 심화된다. 과외수업을 받는 학생은 공부와는 담을 쌓고 늘 꾸벅거리며 졸기만 한다. 그렇게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나날을 보내는데다 설상가상으로 근래 들어 부쩍 이명증이 도져 애를 먹는다.

물론 그는 흔히 우리가 취할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으려 시도한다. 귀의 울림이 도지면 인터넷에서 백색소음 샘플을 이것저것 찾아서 듣는다. 병원에 가서 진찰과 상담도 받는다. 하지만 원인도 발견되지 않으니 뚜렷한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는 치매가족을 가진 이들의 자조모임에 참석하다 치매 간병으로는 대선배 격인 주희를 만난다. 서로 동병상련의 고충을 가진 둘은 곧 가까워진다.

주희는 윤수와의 대화를 통해 속내를 편안하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녀 역시 말하지 못하던 게 참 많았다. 그렇게 남에게 털어놔도 동감을 얻기 힘들던 각자의 삶을 나누는 건 금방 둘만의 비밀처럼 접착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거기에 더해 주희가 가진 문화예술에 대한 폭넓은 관심사와 해박함은 윤수의 작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둘의 관계는 물의 끓는점 경계를 아슬아슬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치원은 작은 장의업체 실장이다. 실무는 치원에게 내맡겨둔 사장과의 협의로 신입직원 은경을 맞이하게 된다. 은경은 관련 일자리에서 처음 일하는 초보자이지만 시신을 염하는 등 안 해본 사람이라면 동요되기 쉬운 일처리도 무덤덤하게 잘 소화한다. 치원은 업무를 마치면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요즘 찾아보기 쉽지 않은) 길거리 장난감 총 사격장을 찾는데 은경 역시 그곳을 종종 애용하는데다 무표정한 얼굴로 빼어난 사격 솜씨를 발휘한다. 그런 은경에게 치원은 점점 흥미가 생긴다.

치원은 언젠가부터 주변 사람들에게서 타인은 보지 못하는 기이한 형상을 보기 시작한다. 마치 예지몽처럼 상대방의 미래 얼굴을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부정적인 반응만 얻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그는 마치 자신이 소설 속의 인물처럼 누군가의 뜻에 의해 쓰이고 있다는 생각에 끌리기 시작한다.

은경은 습관적으로 자해를 하거나 소소하지만 충동적 일탈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녀는 환청을 자주 듣기에 심리상담도 받곤 하지만 역시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하다. 어느새 은경은 환청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여버리게 된다. 그런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영감의 근원이 되어주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염려하며 챙겨주는 '오지랖'도 발휘한다. 치원은 계약조건과 다르게 뒤통수를 치려는 사장의 부당한 처사에 평소와 다르게 분노를 터트리지만 정작 당사자인 은경은 별로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일을 이어간다.

안개 속 도시의 골목길에 빨려 들어가는 영화
 
 영화 <픽션들> 스틸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그렇게 사인사색 캐릭터 설정을 소개한 뒤 이야기는 점점 미로의 입구로 진입한다. 마치 처음 가보는 구도심 번화가의 복잡한 골목길에서 헤매다 동행은 잃어버리고 낯선 타인과는 빙글빙글 돌다가 거듭 마주치는 격이다. 기존에 구축해놨던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서로 겹쳐지거나 하면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의 머릿속은 라비린토스 미궁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주인공들은 동일한 행동을 거듭 반복하기 시작하고 관객은 곧 이 패턴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추리하게 된다. 캐릭터 간의 관계가 영화 속 현실과 환상, 혹은 실제와 픽션을 오가며 교차하는데 정답이 정해져 있기보다는 관객 각자의 상상으로 재구성하는 게 어울리는 구조다.

그렇게 중반 이후부터 영화 속 이야기는 구체적인 결론과 갈등의 해소라는 전형성과는 담을 쌓고 단절되어버린다. 관객이 혹시나 하며 아무리 미로를 헤매고 다녀도 속 시원한 출구는 안내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관객은 각자의 길을 찾거나 현재 처해진 상황을 스스로 규정해야만 하는 곤혹에 직면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 <픽션들>은 예술가병에 걸린 괴짜 감독의 기행에 관객이 함정에 빠지는 불편한 트릭인 걸까. 딱히 그렇지도 않다. 기실 감독이 영화에 대해 거짓으로 포장하거나 숨겨둔 비밀이 딱히 유별나진 않다. 일단 제목부터 <픽션들>은 꽤나 정직한 편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바로 20세기 남미의 대문호 보르헤스의 대표작, 저 유명한 '바벨의 도서관'이 수록된 단편집의 제목이기 때문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남미문학 특유의 스타일이 2022년 한국독립영화에서 구현되고야 만다.

하지만 굳이 소설을 찾아 완독할 필요까지는 없다. 영화는 우리가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개념 혹은 이미지를 연상할 때 떠올리는 공감각만 개방하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수위로 세팅되어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에서 공통된 스타일처럼, 환상의 현관을 꾸며놓고 지나가던 이들이 호기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다 기어코 문을 열게 만든다. 그렇게 조바심을 내며 진입하게 되지만 정작 문 안에는 그들이 기대했던 근사하고 편안한 인테리어와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는다. 대신에 각자가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야하는 초현실적 시공간이 펼쳐지는 체험이 영화에도 도입되는 식이다.

바벨의 도서관 같은 기본구조에 더해 (감독이 인터뷰 등에서 밝혔듯) 보르헤스의 고향 아르헨티나에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면 연결되는 포르투갈의 대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대표작인 <불안의 책>이 짙게 드리운 도시 곳곳을 뒤덮듯 뿌려놓은 불안의 정서가 영화 속 현실의 공기를 이룬다. 모더니즘 문학의 고전이 된 <불안의 책>이 선보이는 도시공간의 미로 풍경이 주는 영감이 근래 한국독립영화에서 종종 목격되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픽션들>의 제목과 홍보 카피는 의도적으로 보르헤스와 페소아의 거미줄 안에 포획되기를 자청하는 모양새다.

시대의 불안을 풀이하는 섬세한 키워드(들)의 영화
 
 영화 <픽션들> 스틸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여기에 추가로 배치된 몇 개의 키워드가 마치 난해한 골목길 투어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안내표식처럼 기능한다. 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사회의 불안한 기운과 정제되지 않은 욕망들이 충돌하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주인공들의 대화와 그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장면들을 통해 거듭 반복해 출현한다. 특히 주인공 중 윤수가 과외하는 집 어머니와 맺는 관계는 파스빈더의 영화 내용과 고스란히 매치되는 '오마주'에 가까운 설정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독일권의 전후세대를 상징하는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이름도 소환된다. 전통적인 기승전결 형태의 서사구조를 파괴하고 의식의 흐름에 따른 일상 곳곳의 균열을 서술하던 작가의 태도를 떠올린다면, 그저 파편적인 유희로 느껴지던 영화의 뜬금없는 맥락에 역사적 맥락과 사회학적 고찰이 입혀지는 걸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사회참여나 비판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다분히 현학적으로 감독이 체감했을 21세기 한국사회의 집단적 무의식과 그 안개 속에 갇힌 개인들의 불안을 징후적으로 포착하고 다채롭게 소개하는데 집중하려 한다. 개개인이 품은 그들 각자의 불안을 꼭꼭 감춰둔 채 속만 앓기보단 끄집어내 표현하자는 태도다. 주인공 4인은 각자가 표상하는 '불안'의 형태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현대사회의 삶에서 불안을 배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포용하고 함께 살자며 손을 내민다. 마치 21세기 들어 반복되는 전염병을 대하는 전향적 태도처럼 말이다. 마침 영화와 감독이 그 개입력을 적극적으로 공개한 20세기의 작업들은 공통적으로 전염병과 대전쟁의 영향 아래 놓여진 것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기존의 익숙한 서사구조를 깨트리고 보르헤스와 페소아가 선보였던 문학적 시도를 시각예술로 다음 세기에 들어서 도전하는 태도는 후발 장르로서 영화가 앞선 장르들의 자양분을 흡수하고 재해석하려는 추격전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래서 <픽션들> 속 몇 개의 장면이나 스토리 전개가 앞선 도전의 예시들과 겹쳐지거나 차용하는 형태로 보이는 건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대신에 그런 변용을 콕 짚어내는 보물찾기의 쾌감이 반대급부로 추가된다.

20세기 문화예술사의 풍성한 유산을 21세기 한국에서 풀어내려한 이 희귀한 실험의 결과물에 대한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겠지만, 영화 곳곳에 비치된 안내표식과 길잡이 리플릿 챙기는 것 역시 관객의 책임이 될 테다. 그저 지나치기엔 영화가 품은 게 꽤 풍성하고 방대하다.

<작품정보>
픽션들
2022|한국|아방가르드 시네마
2022.11.24. 개봉|93분|15세 관람가
감독 장세경
주연 김권후(윤수 역), 이태경(은경 역), 박종환(치원 역), 구자은(주희 역)
제작 경필름
배급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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