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법원을 움켜쥐고 싶은 정치인들

고승욱 2022. 11. 23.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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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준 대법관 임명동의안 무려 119일 동안 국회서 표류
대법관 13명 임기 중에 임명할 윤 대통령 첫 인선에 갈등 증폭
타협 모르는 보수·진보 싸움에 법원·법관의 정치화 우려돼

내년도 예산안,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당장 심의에 나서야 하는 각종 법안까지. 국회에는 의원들이 처리해야 할 일이 산 같이 쌓여 있다. 22일 현재 각종 법률 제·개정안 1만2808건, 청해부대가 아덴만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해도 좋다는 파견연장 허락을 비롯한 동의안 17건, TV 수신료 인상 등 승인안 4건, 북한 미사일 도발 중단 촉구 같은 결의안 98건, 윤리특별위원회에 회부된 징계안 30건이 계류돼 있다. 그런데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안건이 하나 있다. 바로 오석준 대법관 후보자 임명 동의안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월 28일 임명 제청을 받아 8월 9일에 국회에 제출했다. 최장기 표류라는 영예롭지 못한 기록이 깨진 게 벌써 열흘 전이다. 여태 미적거리던 국회가 오는 24일 인준 표결에 나서기로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를 받아 대법관을 임명하는 미국은 어떨까. 미국 상원은 연방 대법관 임명안을 쉽게 통과시키지 않는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해 웬만하면 승인해주는 장관과 다르다. 1789년 대법원이 설립된 뒤 지금까지 상원은 대법관 후보자 165명 중 128명만 승인했다. 임명동의 거부율이 22.4%에 이른다. 지난 8일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 결과는 의회가 대법관 임명에 까다롭게 구는 이유를 간명하게 보여줬다.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으로 선거운동 초반부터 고전했던 민주당은 낙태와 기후변화 이슈에 여성과 젊은 층이 공감하면서 되살아났다. 그 이슈가 나온 근원지가 대법원이다. 낙태권을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판례를 49년 만에 뒤집었다. 환경보호청(EPA)의 온실가스 배출 규제권을 제한했고, 공공장소에서의 총기 휴대를 제한한 뉴욕주의 법이 위헌이라고 했다.

이런 대법원 보수화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작품이다. 그는 2017, 2018년에 보수 성향의 판사 2명을 연이어 대법관에 앉혔다. 임기를 4개월 남기고 진보 성향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췌장암으로 숨지자 강경 보수파인 에이미 코니 배럿을 임명해 대법관의 보수·진보 비율을 6대 3으로 역전시켰다. 미국 연방 대법관은 종신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출신 대통령의 임기 중에 자진 사퇴하는 방법으로 대법원의 이념적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긴즈버그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대법원 보수화의 기회를 트럼프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2016년 공화당은 임기가 1년 남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메릭 갤런드 후보자를 낙마시킨 적이 있다. 3년 뒤 공화당은 말을 싹 바꿔 배럿 인준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당시 상원의 공화당 의석은 52석, 배럿 찬성표는 52표였다. 우리 언론은 미국판 내로남불이라고 썼고, 미국 언론은 노골적인 대법원의 정치화라고 비난했다.

그동안 대법관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우리 정치권도 생각이 많이 달라진 듯하다. 보수와 진보로 양분된 극단적인 진영화의 결과일 수 있고, 모든 갈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채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비타협적 정치문화 탓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윤 대통령 임기 중에 대법관 14명 중 13명이 교체된다는 점이다. 법관 인사권을 쥔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기도 내년 9월이면 끝난다. 헌법재판소도 그렇다. 유남석 소장을 포함한 재판관 9명이 윤 대통령 임기 가 끝나기 전 바뀐다.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주축인 사법부의 ‘진보 벨트’가 끊어질 수밖에 없다. 오 후보자는 그 변화를 예고하는 첫 주자다. 서울법대를 나오지 않은 고위 법관을 찾기 어려운데 윤 대통령의 서울법대 후배라는 점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굳이 부각된 이유다. 나머지는 부차적이다. 요금 800원을 횡령한 버스 기사의 해고가 정당했다는 판결을 놓고 벌인 논란은 말초적일 뿐이다.

지금처럼 정치인에게 법원의 존재가 막중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선고가 지연되는 시간만큼 정치 생명이 연장되는 국회의원이 한둘이 아니다. 법원의 영장 발부 여부가 여의도의 풍향을 바꾸고 있다. 오죽하면 ‘판·검사의 법 왜곡 처벌법’을 만들자는 마당이다. 그 속에는 법원을 움켜쥐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미국 유권자들은 무리한 대법원 보수화를 표로 응징했다. 우리 유권자들도 국회가 대법관 임명동의안을 곧바로 처리하지 않고 질질 끌었던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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