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돌고래의 눈은 웃고 있었다

2022. 11. 23.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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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정 문화평론가


아쉽게도 대학교에 다니던 그 시간들이 내겐 흐릿하다. 누군가는 소주병을 궤짝으로 쌓아 올리면서 술을 마셨다는 알코올 무용담을 펼쳐 놓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원 없이 연애를 해봤다며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하지만 나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 매일 열등감에 휩싸였고, 그러니 대학 생활은 더욱 재미가 없었다. 300점대 초반이면 서울대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최악의 난이도로 유명했던 수능이 치러졌던 그해, 나는 시험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교대 진학을 권유하던 고3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학교를 지원한 것이 내 인생 첫 번째 일탈이었다. 그때까지 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알아서 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집이 있던 경기도 평촌에서 학교로 가는 지하철 2호선을 갈아타기 위해 매일처럼 지나가야 하는 역이 있었다. 4호선 ‘대공원’역이다. 아침 8시 그야말로 온몸이 옴짝달싹도 못하게 꽁꽁 매여 일터로, 회사로 끌려가는 듯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이번 역은 대공원, 대공원역입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비현실적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1교시 수업 시간에 맞추기 위해 출근길 지옥철에서 회사원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그냥 대공원역에 내려 버렸다. 화요일 아침 8시 그 커다란 역에 내린 사람은 나 혼자였다.

갑자기 돌고래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역에서 올라와 대공원 매표소로 걸어 올라갔다. 늦가을 이른 아침 텅 빈 동물원에는 갑자기 등장한 나와 동물들뿐이었다. 미처 손님 맞을 준비를 못한 듯 이제 막 잠에서 깨어 졸린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보던 기린과 코끼리를 지나 수족관으로 갔다. 돌고래 쇼를 기다리며 자카스 펭귄 가족들을 구경했다. 목선을 따라 길게 검은 줄이 나 있고, 눈에는 아이섀도를 한 듯 연분홍색 점이 수줍게 박혀 있어 미모로 단연 눈에 띄는 펭귄이다.

“혼자인데 돌고래 쇼 하나요?” 시간이 돼 매표소 앞으로 가니 역시나 혼자다. 매표소 동그란 문 안에서 “그래도 해요” 목소리가 들려온다. 빈 객석에 뻘쭘하게 앉아 있자 작은 체구의 여자 조련사가 무대로 등장해 휘파람을 분다. 이내 수족관의 잔잔했던 물결이 출렁이더니 돌고래가 반짝이는 온몸을 드러내며 솟구쳐 올랐다. 힘껏 점프를 하던 돌고래의 동그랗고 까만 눈과 마주쳤다. 두 눈이 웃고 있었다.

동물과 인간의 교감은 언제나 뜻밖의 감동을 준다. 며칠 전 다양한 환경 다큐멘터리를 무료로 서비스하는 비영리 OTT 워터베어에서 ‘고래와 나’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13분의 짧은 다큐멘터리는 남태평양의 라로통가 섬에 살고 있는 고래생태학자 낸과 고래의 우정을 담고 있다. 낸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함께 수영을 하던 고래는 딥 블루의 심연으로 천천히 낸을 이끌고 들어간다. 인간과 고래의 하모니로 완성되는 아름다운 유영에 코끝이 찡해진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다가오는 거대한 타이거 상어.

이 위기의 순간 고래가 상어를 가로막더니 낸을 꼬리쪽으로 감추면서 수면 위로 밀어낸다. 가까스로 보트에 올라선 낸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상어를 쫓아낸 고래가 낸의 주위를 천천히 몇 바퀴 맴돈다. ‘너 괜찮니’라고 묻는 듯이. 기후변화와 인간의 횡포로 고래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이미 낡고 낡은 구호가 된 지 오래지만 이 짧은 영상은 ‘함께 사는 삶’을 깊게 각인시킨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몇 번, 나는 지하철에서 탈락하듯이 튕겨져 나와 대공원역에 내려 돌고래를 보러갔다. 그 돌고래의 이름이 ‘제돌이’였다는 것을 한참 뒤에 신문을 통해 알았다. 2012년 서울시는 돌고래 쇼를 중단하고 제돌이를 방사했다. 그리고 난 졸업을 했고, 회사라는 목적지로 순순히 향하는 중년이 됐다. 그래도 가끔 못 견디게 북적이는 일상에 시달릴 때면, 제주도 앞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돌고래를 상상한다. 그 동그랗고 까맣게, 웃고 있던 두 눈을.

최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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