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만 3년, '나의 삶' 재단하기까지... "나에게 양복이란 '여용기'다" [ASK TO :]

옥지훈 2022. 11. 2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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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동 꽃할배' 여용기 에르디토 재단사, 최근 '시니어 청바지' 브랜드 론칭
맞춰 입던 양복의 기성화, 양복점 폐쇄... "건설현장부터 주차요원까지 닥치는대로 일했다"
클래식의 소통, 트렌드를 따라가보니 '제 2의 전성기'
기본이 정점에 이른다... 변화의 시작, 시니어 모델까지


여용기 재단사(70)가 서울 논현동 소재 카페에서 인터뷰 전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나라가[naraga] 유튜브 캡쳐

세월이 흐르면 몸과 마음은 변한다. 일상 속 스타일은 세상과 맞춰 보편적인 어울림을 택하는 것이 편하다고 여긴다. 유행은 늘 같은 방식으로 돌고 돌았다. 여용기(70) 재단사는 경남 거제군(현 거제시)에서 태어났다. 10월 7일 논현동. 평소라면 튀었을 노란 넥타이가 눈에 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분위기. 그는 양복 색상을 먼저 염두하고 안경테부터 모든 색상을 매칭했다.


고향을 떠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는 막상 고등학교 갈 형편이 못돼 거제군으로 다시 내려가려했다. 그러자 지인은 그에게 양복 재단사 일을 배워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는 그 당시 어린 나이였던 자신을 떠올렸다. "위에 형이 하나 있는데, 당시 옷을 대물림 해 입는 것이 싫었다. 내가 한번 만들어 입어보는 건 어떨까"라고 회고했다. '광복동 꽃할배'는 순수(純粹)가 만들었다.


바느질만 3년 남짓 했다. 단순 작업이라기엔 고된 일이다. 재단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바느질만 하다 보니 3년이 무색하다. 그에게 재단 일을 가르치던 선생은 어느 날 제자에게 "이 정도면 네가 어디 가서 재단사 일을 할 수 있겠다"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부산 남포동에 위치한 모모양복점에서 재단 일을 시작하게 됐다.


여용기 재단사(70)가 작업실에서 맞춤 양복 재단을 하고 있다. ⓒ 나라가[naraga] 유튜브 캡쳐

■ 맞춰 입던 양복의 기성화, 양복점 폐쇄까지... "건설현장부터 주차요원까지 닥치는대로 일했다"


여 씨는 SNS를 통해 청년들과 소통한다. 일흔이라는 나이에도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5만에 가깝다. 유행을 인정하는 모습은 그의 인생담 속에서 알아차릴 수 있었다. 29살이라는 나이에 모모양복점을 인수하면서 부터 문을 닫기 까지.


재봉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그 당시 재봉틀은 부의 상징이었다. 대기업이 양복을 기성화 하기 시작했다. 기획부터 디자인, 봉제까지 이르러 다수를 상대로 상품화 했다. 여 씨는 "그 당시 양복은 맞춰 입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그는 모모양복점을 인수한 이후 10년 남짓 운영을 이어가다 양복점을 폐쇄하게 됐다.


그는 유행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 아니다. 양복은 맞춰 입는 것이라는 생각은 양복점을 운영하는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 흐름 따라 옆 나라 일본마저도 양복의 기성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바느질부터 신체를 측정해서 세분화하는 그는 양복이 누구에게나 맞는 기성복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여 씨는 "내 직업을 버리고 다른 일을 막상 하려니 할만한 게 없었다"며 "건설 현장이든지 길거리 주차도 하면서 20년 넘어서 딱 60이 됐다"고 말했다.


여용기 재단사(70)가 서울 논현동 소재 카페에서 인터뷰 전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나라가[naraga] 유튜브 캡쳐

■ 클래식의 소통, 트렌드를 따라가보니 '제 2의 전성기'


그는 바쁘게 살다 보니 이순(耳順)에 가까운 나이가 됐다. 이순이란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를 뜻한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왔다. 잊고 지내던 재단사 시절 직물점 대표로부터 지인이 양복 재단사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한 달만 시간을 달라고 말한 뒤, 다시 감각을 일깨웠다. 이후 직물점 대표가 소개해 준 양복점으로 찾아갔다.


그 양복점을 찾아가보니 기성복을 만드는 곳이었다. 부산 일대에서는 유명한 곳이었다. 맞춤 양복의 인기를 사그라들게한 기성복을 만드는 곳이 불현듯 맞춤복을 하겠다는 것. 여 씨가 만난 양복점 대표는 젊었다. 그렇게 젊은 대표와 함께 양복의 트렌드를 만들어 갔다.


여 씨는 "그 당시 양복점 직원들이 한 스물 두 살에서 여섯 살까지 어린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며 "옛날에 양복점 하던 트렌드하고는 전혀 달랐다"고 말했다. 이어 "그 젊은 친구들이 입는 옷을 제작하려니 처음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며 "당시 유행을 좇아 제작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여용기 재단사(70)가 작업실에서 맞춤 양복 재단을 하고 있다. ⓒ 나라가[naraga] 유튜브 캡쳐

■ 기본이 정점에 이른다... 변화의 시작, 시니어 모델까지


처음에는 여 씨가 말하는 맞춤복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고객들은 원하는 스타일을 요구했다. 그는 "고객들이 해달라는 대로 하게되면 옷을 못입게된다. 1년만 지나면 다시 수정해달라고 할 것이다"라며 "이후 내가 말한대로 딱 1년 뒤에 옷을 그대로 들고 오더라"고 했다.


여 씨는 맞춤복에 '소통'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만든 옷을 보고 마음에 들어도 혹시나 원하는 부분이 있으면 좀 다르게 해서 수정해주는 것이 어떤가"라며"그 때 생각한 것이 지금까지 진행해오면서 양복점이 성공적으로 잘 된 케이스"라고 말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여 씨는 청년들에 앞으로 잘하기 위해서는 기본이 우선이라고 했다. 그는 "첫 째는 건강이다. 건강하지 못하면 일을 할 수가 없고 몸이 먼저 갖춰져있는 것이 기본"이라며 소통을 강조하기도 했다.


SNS로 주로 소통한다는 그는 "젊은 친구들과 만나면서 주로 어떤 옷을 입는 지 보면서 다양한 스타일에 대해서 알게 됐다"며 "처음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입는지도 보면서 유행 스타일에 대해서 더 알아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양복이란 자신의 몸에 맞춰 입듯, 삶 또한 자신과 맞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맞지 않겠나"라며 "기본에 충실하고 하다보면 성공은 언젠가 이룰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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