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희생자 최보람의 치열했던 35년 [이태원 압사 참사]

손가영 입력 2022. 11. 21. 05:21 수정 2022. 11. 2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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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희생자 최보람씨 이야기] 그의 아버지가 조용히 장례 지낸 기막힌 이유..."국가는 과연 뭘 했나"

[손가영 기자]

 고 최보람씨가 생전 친구과 찍은 사진.
ⓒ 유족 제공
 
영어강사 고 최보람씨는 지난 10월 29일 이태원 압사 참사에 휘말려 안타깝게 숨을 거뒀다. 1987년 9월 19일생으로 향년 35세다.

영어강사인 그는 10년 넘게 어학원 등에서 일하며 아동·청소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왔다. 참사가 일어나기 2주 전에도 막 새 영어학원에 취직해 적응하던 중이었다. 참사 하루 전인 28일엔 학원 아이들에게 핼러윈을 가르쳐주며 아이들과 먼저 핼러윈 파티도 즐겼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0일 이태원 참사 현장을 직접 보러 온 최씨의 유족, 작은 아버지 최경석씨와 고모 최경아씨를 만났다. 최경아씨는 조카에 대한 추모 편지를 써서 이태원역 추모 공간 담벼락에 붙이고 있었다.

최경아씨는 "큰 오빠(최씨 아버지), 작은 오빠, 저 모두 보람이의 흔적을 찾고 싶고, 보고 싶다"며 "누군가 보람이를 애도하는 마음에 포스트잇이라도 썼을 텐데, 내가 꼭 대신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직접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 걱정에 미국 유학 접고 귀국했던 청년
 
 고 최보람씨가 중학생 때 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
ⓒ 유족 제공
 
최씨는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서 나고 자랐으나 중·고교 유년시절은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있던 작은 아버지가 '미국에 와서 영어도 배우고 공부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자 '해보겠다'며 어린 나이에 훌쩍 떠났다. 그렇게 6년을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위치한 켄우드(Kenwood) 중·고교에서 수학하며 자랐다.

6년 동안 그를 돌봤던 작은 아버지 최경석씨는 "미국에서의 보람이는 약간은 내성적이고 또 착했던, 평범한 아이였다. 음악과 사진찍는 걸 좋아했고, 패션잡지도 정기구독해서 열심히 들여다봤다"며 "god나 H.O.T. 같은 가수에 너무 푹 빠져 있어서 '여기서 공부할 건 해야지' 하며 많이 혼냈던 것도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스무 살이 될 즈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귀국을 만류했으나 최씨는 이를 강하게 뿌리쳤다. 이유 중의 하나가 할머니였다. 부모님 사정으로 최씨는 갓난아기 때부터 친가 쪽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컸다. 최씨의 고모 최경아씨는 "할머니도 너무 그립고, 한국도 너무 그리워했다"며 "'내가 미국에 있는 와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떡하느냐'며 반항도 크게 했다"고 기억했다. 

최씨가 한국에서 처음 선택한 진로는 사진이었다. 백제예술대학 사진학과에 진학해 공부하다 중간에 그만뒀다. 최경석씨는 "사진을 참 좋아했는데, 고된 업무 환경 등 사진 업계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부딪혀 중간에 포기를 하고 영어강사 쪽으로 진로를 틀어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20대 중반부터 숨을 거두기 전까지 10년가량을 꾸준히 영어교사로 일했다. 아이들을 좋아했던 최씨는 "내가 유치원에서 가장 예뻐하는 애기"라며 자신의 SNS에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종종 올렸다. 자신이 찍은 풍경 사진도 꾸준히 SNS에 게시하며 한때 동경했던 사진에 대한 관심도 계속 드러냈다.

지난 3월 보람씨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았다. 최경아씨는 "할머니가 엄마 같은 존재였을 텐데, 할머니를 보내면서 많이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사망 전 할머니 모습에 대해 최경아씨는 "엄마가 밤에 잠을 잘 때마다 보람이 이름을 말하는 섬망 증세를 보였다"며 "'보람아 내가 너한테 돈 쓰는 건 하나도 안 아까워. 똑똑한 애니까 네 공부는 다 시킬 거다. 어찌 됐든 공부 더 시킬 거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라'라고 밤마다 말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둘은 많이 다투면서도 참 돈독했다. 싸우는 걸 보면 영락없는 모녀의 말다툼이었다"며 "보람이가 '할머니 이리 와. 이거 먹어야지. 야채 먹어야지'라고 잔소리를 할 때면 '야 네가 남편 같다?'라고 농담을 쳤던 게 기억난다"고도 덧붙였다.

"유족 충분한 애도·위로받지 못하게 만들어..."
 
 최보람씨의 고모가 이태원역 1번출구 추모공간에 게시한 추모글.
ⓒ 손가영
 
유족은 참사 다음 날인 30일 정오께 보람씨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됐다. 이들은 참사가 일어났던 밤부터 뉴스를 보며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다'며 걱정을 했지만 보람씨가 희생됐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경석씨는 "참사 날 밤에 형(최보람씨 아버지)이랑 집에서 술 한잔 걸치고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 140여 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고 얘기를 나눴다"며 "그런데 낮12시쯤 집에서 나오는 길에 의정부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 보람이가 의정부 길 병원에 있다고. 바로 의정부로 갔고, 보람이를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겨 왔다"고 말했다.

유족은 보람씨의 부고 소식을 주변에 알리지 못했다. 최경아씨는 "보람이의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연락하지 않고, 조용히 치르자고 했다"며 "애도, 위로의 말이 제일 먼저 나와야 할 때에 '이태원에 왜 갔느냐' '막지 않은 부모들' '놀다가 죽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제일 먼저 나왔다. 유족이 어떻게 영향을 안 받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

대통령 명의의 화환도 빈소에서 금세 치워졌다. 울분에 찬 한 유족이 장례식 첫날 빈소에 도착한 화환을 보자마자 쓰러트려 버렸다.

"우리 보람이, 치열하게 살았다"
 
 사고 당일 이태원에서 최보람씨가 찍은 사진.
ⓒ 유족 제공
 
최경아씨는 정부가 유류품을 일주일만 보관한다는 소식에 유류품센터가 있는 용산구 다목적 실내체육관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기도 했다. 그는 "11월 3일 막 삼일장을 마친 후였는데 5일에 센터 문을 닫는단 소식을 그날 당일 알았다"며 "이후 13일까지 연장한다고 바뀌었지만, 처음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처럼 늦게 안 유족이 더 있을 수 있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최씨는 그날 보람씨의 핸드백을 찾았지만 보람씨의 신발은 찾지 못했다.

보람씨의 유족은 최근 벌어진 '희생자 명단 공개' 논란을 두고도 정부를 비판했다. 최경석씨는 "왜 애초부터 (유족과 소통하지 않고) 명단 공개를 문제인 것처럼 막았는지 모르겠다. 선량하게 한국에서 살던 이런 사람이 사고로 희생됐다는 얘기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다고 희생자가, 참사가 없어지느냐"며 "정부는 유족들이 서로 모이거나 소통할 공간도 안내해주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최경아씨는 보람씨의 참사 전 삶의 조각을 찾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중이다. 그러나 심적 고통이 커서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가장 최근에 남긴 기록이 청년전세자금 대출을 알아본 거더라. 마냥 애인 줄 알았는데, 치열하게 살았던 청년이었다"며 "마음이 버거워 폰을 켰다가도 계속 보기가 힘들더라"고 말했다.

최경아씨는 "참사 한 달 전이 보람이 생일이었다. 그때 친구가 뭘 받고 싶냐고 묻자 보람이는 '손편지를 받고 싶다'고 답했더라"며 "손편지엔 너는 참 따뜻한 아이고, 웃음이 많고... 쭉 쓰여져 있는데 가슴이 아파서 더는 못 읽었다"고 설명했다. 

최경석씨는 "이 참사는 100% 국가 책임이다. 누가 그 길거리를 통제할 수 있느냐? 국가와 경찰 아니면 할 수가 없다"며 "반드시 사고 진상을 규명해 책임을 물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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