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위태로운 천주교 신부, 그는 의외의 요청을 했다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2022. 11. 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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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팬데믹이 부른 조선 최초의 커피 주문

[이길상 기자]

커피와 관련해 한국 최초에 관한 질문이 많다.

한국에서 작성된 기록 중에서 커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무엇일까? 한국 땅에서 커피를 마신 최초의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인 중에서 커피를 처음 마셔본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에서 처음으로 커피 음료를 판매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이고,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에서 최초로 커피 재료 판매를 시작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에 처음으로 커피가 수입된 것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일까? 한국 최초의 커피 광고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아쉽게도 정확한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은 거의 없다.

현존 기록상 조선에 커피라는 음료가 처음 글로 소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70년 전이다. 청나라 위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와 서계여의 <영환지략>(瀛環志略)을 토대로 1848년에 쓰인 <벽위신편>(闢衛新編)을 1852년에 개정하면서 '필리핀 편'에서 커피를 소개하였다. "필리핀에서는 커피라고 하는 편두(필자: 까치콩)와 비슷하고 청흑색인 것을 볶고 끓여 먹는데 맛은 쓰고 향은 차와 비슷하다"라는 내용이었다.

1857년에는 실학자 최한기가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커피 생산 국가 필리핀, 인도네시아, 아라비아, 브라질 등을 언급하였고 미국인들이 커피 마시는 방식을 소개하였다. 이 책들을 일반 대중들이 읽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책을 쓴 윤종의나 최한기가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커피라는 낯선 음료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1850년대에 커피라는 음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조선의 커피 역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천주교 전래다. 조선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8세기 말이다. 주로 중국을 통해서였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 1784년이었다. 천주교는 1801년의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30년대 이후 조선에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전파한 것은 프랑스 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 소속 신부들이었다. 교황청이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립하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의뢰해 신부 파견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이 1831년이었다.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Barthélemy Bruguiére) 신부가 조선의 첫 번째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입국 준비 중 중국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최초로 피에르 모방(Pierre Maubant) 신부가 밀입국하기까지는 이후 4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모방 신부는 1836년에 상복 차림으로 위장하여 입국한 후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조선인 신학생 3명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것도 모방 신부였다. 이듬해에는 로랑 앵베르(Laurent Imbert) 주교가 입국하였는데 당시 자생적으로 성장한 조선의 천주교인 숫자는 이미 9천 명을 넘어선 상태였다. 모방 신부와 앵베르 주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해제되고 커피와 카페가 다시 유행하던 시기였다.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한 세 명의 조선 유학생들이 프랑스 신부들로부터 커피를 대접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의 책임자였던 나폴레옹 리부아(Napoleon Libois) 신부가 이들 조선 유학생들을 지도하고 후원하였는데 리부아 신부는 훗날 조선에 커피를 보낸 주인공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오래전부터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등에서 포교 활동을 할 때 커피를 하나의 포교 수단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이들 초기 천주교 유학생들이 최초로 커피를 마셔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에 귀국하여 포교 활동과 선교사 입국 길을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1846년 9월에 순교하였다. 조선의 천주교 역사에서 김대건 신부의 체포와 순교 이후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대대적 탄압(병인박해)이 시작되기까지의 20년, 철종의 재위 기간은 비교적 조용한 시기였다. 선교사들의 생활 또한 이전이나 이후에 비해 안정적이었다.
 
 신안 흑산성당 앞의 조형물들.
ⓒ 이돈삼
 
콜레라 창궐에 천주교 박해까지

3대 페레올 주교에 이어 1856년에 조선교구의 네 번째 대표 신부로 임명된 후 입국하여 조선 천주교 전도를 책임진 이가 시메옹 베르뇌(Siméon Berneux) 주교다. 교인 홍봉주가 상하이까지 가서 베르뇌 주교를 중국인 어선에 태우고 백령도 근처 무인도를 거쳐 한강 하구 쪽으로 입국하였다. 입국 초기에는 홍봉주가 자신의 이름으로 사놓은 태평동 집, 교인 이군심의 전동(현 견지동) 등에서 기거하였다.

1859년 여름 조선에 콜레라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 해말 좌포도장 임태영과 우포도장 신명순이 주도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벌였다. 방화와 약탈이 이어지는 것과 함께 콜레라가 더욱 창궐하였다.

지방에 머물고 있던 베르뇌 주교는 한양으로 향했지만 자신의 거처가 이미 노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채 남대문 밖 자암마을(지금의 순화동과 봉래동 1가) 임시 거처에 머물렀다. 교인 홍봉주의 이름으로 산 집이었다. 당시 함께 살았던 조선인 신자들이 10명 정도였다. 간혹 주변에 사는 조선인 신자들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지만 거의 은둔 상태였다.

1862년까지 40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낼 정도로 공포스러웠던 콜레라 팬데믹 그리고 천주교 박해라고 하는 이중의 공포 속에 숨어지내던 베르뇌 주교가 홍콩 파리외방전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 1860년 3월 6일이었다.

이 서신에서 베르뇌 주교는 조선의 선교 상황을 보고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토로한 후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였다. 서적, 포도주, 자명종 등 선교 활동에 필요한 물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구입을 요청한 물품 목록에 커피 40리브르와 흑설탕 100리브르가 포함되어 있다. 리브르는 당시 프랑스인들이 파운드(lb, 약 0.45kg)를 나타내는 단위였다. 40리브르는 18.13kg이었다. 홍콩에서 한양으로 인편에 운반하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커피를 주문한 것이다.

왜 베르뇌 주교는 커피를 주문했을까?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홍콩이나 파리 선교본부에 편지를 통해 구입을 요청한 물품 목록에는 선교와 관련되지 않은 개인적인 물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운반 과정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그런 사적 주문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베르뇌 주교가 주문한 커피는 선교 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조선의 선교에 커피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예상 혹은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베르뇌는 커피를 매우 좋아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만주에 머무는 10년 동안 커피를 전도 활동에 활용했을 것이고, 국제도시 상하이를 경유해 조선에 입국할 때 커피를 가지고 왔을 가능성도 있다. 쓰고 구수한 숭늉에 익숙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설탕을 넣은 달달한 커피는 환영받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베르뇌 주교가 많은 양의 커피를 무리하게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베르뇌 주교가 주문한 커피는 1년 1개월 1일 만인 1861년 4월 7일 오전 5시에 남대문 밖 자암마을 베르뇌 주교의 은신처에 도착한다. 공식적인 기록이 전하는 우리나라에 커피가 전래된 역사적인 날이다.

 (유튜브채널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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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2018). 베르뇌주교서한집 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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