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신 배운 변태, 노상윤 감독의 아이돌 촬영법
Q : 부산국제영화제 GV는 잘했나? 전석 매진에 질문도 쏟아졌다더라.
A : 내 영상을 영화관 스크린으로 보게 된 것도, 좋아해주는 분들을 실제로 본 것도 처음이라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다. 객석을 보고 놀랐다. 내가 아이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많은 분들이…?(웃음) 어안이 벙벙하고 신기하고 반가웠다. 스크린으로 보면서 내가 정말 얼굴에 집착하는구나, 타이트한 컷을 많이 쓰는구나 느꼈고.(웃음)
Q : K팝 신의 배운 변태가 오셨다.(웃음) 어떤가, 다들 당신을 젊은 천재라고 부른다.
A : 어우, 그러지 마라. 부끄러워 죽겠다. 겸손 떠는 게 아니라, 여태까지 계속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던 것도, GV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꼴값하기 싫어서였는데… 이렇게까지 거절하는 것도 꼴값인 것 같아서 나왔다.(웃음) 나는 그냥 과대평가된 애송이다. 단지 아주 어릴 때부터 되고 싶은 게 분명했고, 정말 많은 영상을 보며 자랐을 뿐이다.
Q : 우리가 만나기 전, 내게 보낸 메일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MTV VMA 디렉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 될성부른 어린이였다고.
A : 맞다. 빅토리아 시크릿 쇼의 화려한 세트에서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섹시백’을 부르는 걸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패션 에디터도 되고 싶고, PD도 되고 싶고, 쇼 디렉터, 사진작가도 되고 싶었는데 결국 모아보면 비주얼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Q : 중2 시절, 처음으로 용돈으로 〈보그〉 와 〈GQ〉를 사 봤다고. 잡지의 호황기였다. 이 잡지들을 통해 멋과 태도에 좀 배웠나?
A : 동대문에 가서 옷을 사는 게 최고의 멋이던 내게 하이패션의 세계가 열렸다.(웃음) 맥퀸 쇼를 보면서 이렇게 트렌드를 리드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게 대중화돼 리테일로 시장에 나가는 과정이 뒤따른다는 흐름을 알게 됐다. 매혹된 건 패션뿐만이 아니다. 당시 〈GQ〉는 우리가 최고다, 우리를 모르면 안 된다는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웃음) 그게 그렇게 멋져 보였다.
Q : 내가 느낀 게 바로 그거다. 당신의 작업엔 분명 피처 에디터적인 시선과 질문이 있다. 물론 동시대에 맞춰 진화한 버전이지만.(웃음) 개인 작업 ‘KOREAN BOYS’는 마치 당시 잡지의 피처 특집으로 다룰 법한 기획이다.
A : 장우철 선배에게 영향받은 부분이 있을 거다.(웃음) 자기만의 감각으로 비주얼을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 무척 좋아했다. 최근에 만났을 때 아이브의 ‘After Like’ 뮤직비디오를 보고 너무 기특하다고 해줬다.(웃음) ‘KOREAN BOYS’는 그냥 한국의 남자들을 찍고 싶었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덴 소질이 없다. 나는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당시엔 나도 20대 초반이었기에 내가 이해하고 있는 피사체를 찍었고, 자라면서 점점 피사체의 나이대도 올라갔다.
Q : 사람이 궁금한가?
A : 나는 정말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또 좋아한다.(웃음) 이를테면 나는 여행을 갔다가 누군가를 마주치면 그 사람의 역사가 궁금하다. 어디서 어떻게 자랐고, 왜 지금 저 자리에 있는지 너무 물어보고 싶다.
Q : 이 시기 패션지 어시스턴트를 하다가, 인스타그램이 활성화되면서 비디오그래퍼를 찾던 시장의 니즈와 맞물려 김영준 포토그래퍼와 함께 영상 일을 시작했다. 사진보다 영상을 업으로 택한 이유는?
A : 본능적으로?(웃음) 포토그래퍼의 경우 요즘엔 인스타그램에 포트폴리오를 올려 주목받으면 바로 프로로 데뷔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도제 시스템이 있었다. 하지만 비디오그래퍼는 카메라와 나만 있으면 됐다. 기회도 더 많았고.
Q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선 뭘 전공했나?
A : 다큐멘터리 전공이다. 한 주제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게 내 성정과 맞다. 1학년 때는 나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제목은 ‘사랑몰가’(웃음). 내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내가 좋아했던 여자 첫사랑, 남자 첫사랑, 너와 내가 나눈 감정은 뭐였는지 묻고, 기억하고, 상처받았지만 나는 앞으로 더 사랑할 거다. 그렇게 좀 뻔하게 끝냈다.(웃음) 의외로 들리겠지만,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밝히고 캐내고 싶은 마음과 정치적 태도도 있다. 최근 하고 있는 ‘#notyours’ 사진 작업에서 그런 태도가 묻어난다. 이를테면 ‘Different Dream’. 지하철로 통학하던 시절에 ‘무채색으로 입은 사람들이 흐린 눈으로 움직이는 걸 보며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누군가는 주식이 올랐으면 좋겠고, 누군가는 엄마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각자의 욕망이 있겠지.’ 그런 생각을 메타포로 담아낸 작업이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2002년에 팔리던 ‘Be the Reds’ 티셔츠를 입은 이 사진은, 몸만 크고 정신은 자라지 않았으며 선동되기 쉬운 우리 세대의 초상이라고 생각했다.
Q : 왜 ‘Not Yours’인가?
A :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당연한 건 하나도 없잖아. 그래서 붙였다. 네 거 아니야.(웃음)
Q : 다큐멘터리 감독이 될 생각은 없었나?
A : 있었는데 그것보다 비주얼 디렉터가 되는 길이 더 빠르게 진행됐다. 그냥 점프해버렸다.
Q : 디렉터 크루 FILM BY TEAM을 만들고, 〈데이즈드〉 코리아에서 의뢰한 더보이즈 데뷔 필름을 시작으로 당신의 아이돌 작업이 시작된다. 그때의 당신은… 물에 물고기를 데려간 것 같았달까.(웃음)
A :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이게 정말 나와 ‘fit’한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Q : 그 후 작업은 NCT 재현의 ‘Poetic Beauty’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아이돌 산업에서의 일반적 접근과는 달랐다. 서정적이고, 시적이고, 내러티브가 있었고, 시선이 느껴졌다.
A : 영화 〈토탈 이클립스〉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랭보처럼 연출해보고 싶었다. 시를 쓰고, 읽고, 낭독하는. 재현이 끄적일 수 있도록 4가지 종류의 연필을 준비했고, 재현이 볼 사진집 8권을 준비해 이것도 해보자, 저것도 해보자, 열의에 차서 제안했는데 SM에서 다 수용해줘 자유롭게 한 작업이다.
Q :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NCT DREAM 멤버들의 어린 얼굴을 60초 동안 긴 호흡으로 담은 것도 좋았다. 시네마틱하더라.
A : NCT DREAM 멤버들이 첫 번째 앨범 〈We Young〉을 할 무렵이었는데, 밝고 활기차고 신나는 무드의 콘셉트였다. 나는 콘셉트 밖에 있는, 꾸며지지 않은 소년들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60초 동안 바라본 모습 그대로를 담았다. 처음엔 본명을 써서, 제목도 ‘60초의 이제노’, ‘60초의 이민형’이었다. 나는 가려진 것, 보여지지 않은 것, 그러나 진짜인 것. 그런 것에 늘 호기심이 간다.
Q : 피사체를 사랑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마치 연인이 렌즈를 들여다보는 듯한 내밀함이 느껴진달까.
A : 카메라 앞에 피사체가 있을 때, 정말로 사랑해버린다. 나는 촬영할 때 녹화를 끊지 않고 계속 핸드헬드로 피사체를 길게 팔로하는 편이다. 살짝 당황스럽게 한다든지, 상상하게 한다든지, 자기 고유의 모습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다가, 본연의 것이 툭 튀어나왔을 때의 찰나를 놓치지 않는다. 보통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때 매력적인 모습이 나오거든.
Q : 어떻게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나?
A : 우선 분위기를 풀어놓고 이게 촬영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게 한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정말 진심이라는 걸 보여준다. 내가 먼저 내 진심을 내보이고, 가끔은 삐에로가 돼 웃겨주기도 하고, 자조적인 개그를 하기도 하고, 친구처럼,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대한다. 물론 나는 그를 안다. 촬영하기 전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깊게 공부를 해 가니까. 그런데 너무 많이 아는 내색은 하지 않고, 나는 너에게 내적 친밀감이 있으니까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나는 너 좋아하고 절대 이상한 컷 안 쓸 거고, 너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주기 위해 왔다는 걸 많이 표현한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활짝 열면, 그들도 조금씩 열린다. 이제는 나이가 좀 들었지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들 또래였기 때문에 그것도 한몫했던 것 같고.(웃음)
Q : 이후 당신의 전성시대다. 크리에이티브 디렉션까지 하는 HAUS OF TEAM을 만들었다. 기획부터 시작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나?
A : 맞다. 필름바이팀은 디렉터 팀이지만 기획까지 참여하지는 않았고, 콘셉트가 나오면 거기서 디벨롭을 하기 시작해 촬영하는 팀이었다. 그때 아쉬움을 자주 느꼈다. 이 피사체를 사랑하고 더 잘 찍고 싶은데, 얘가 입은 옷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럼 그걸 내가 바꿀 수 없다. ‘더 낫게 하려면 어떡해야 하지? 왜 매번 한계에 부딪히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기획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팀은 나까지 4명으로 PD, 조연출 역할도 있지만 다 같이 크리에이티브 의견을 낸다.
Q : 첫 작업으로 더보이즈의 무대 뒤 날것의 모습을 담은 AAA 사진집을 맡았다. 다큐멘터리처럼 그들의 세계 투어를 따라다니면서 무대 뒤 날것의 얼굴을 찍었는데, 이런 날것, 민낯 같은 모습을 좋아하나?
A : 너무나. 나는 꾸며낼수록 인간적인 매력이 가려지고, 덜어낼수록 극대화된다고 생각한다.
Q : 그 후로는 당신의 기획력을 제대로 보여준 작업, 더보이즈 아이덴티티 필름 ‘제너레이션 Z’를 기획했다. 인터뷰 형식으로 멤버들 개인의 속마음을 이끌어내고, 거기서 콘셉트를 잡아 영상을 만들었다. K팝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기획이었다. 이런 게 바로 ‘피처’적인 콘텐츠라는 건데(웃음) 나도 인터뷰와 화보를 많이 해봐서 안다. 이렇게 개개인의 속마음을 듣고, 개성을 포착하고, 그걸 비주얼라이징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A : 더보이즈와 계약하자마자 냅다 인터뷰부터 했다. 나는 데뷔 전부터 이들을 봐왔다 보니 접근이 더 쉬웠다. “너 요즘 어때?”, “이건 왜 그래?” 이런 식의 편한 질문을 툭툭 던지고 녹취를 풀면서 흥미로운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쳤다. 회사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너무 솔직하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그들의 말에서 출발하는 진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거니까. 하지만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좋아해주는 분이 많을 거라 생각해 기획을 고수했다. 꼭 언급해주면 좋겠는데(웃음) 이건 엄청난 협업이다. 마음을 열고 솔직한 말을 해주는 아티스트가 있고, 함께 이끌어낸 팀원들이 있고, 그걸 하게 해준 회사가 있어 이 콘텐츠가 있는 거니까.
Q : 그 결과물로 “사람들이 저를 착하다고 하는데, 착하기만 하면 매력 없잖아요”라는 주연의 음성과 함께 나쁜 남자처럼 섹시한 모습이 보여지고, “JUYEON IS NOT SUCH A GOOD BOY”라는 자막이 뜬다.
A : 그들의 말에서 포착한 개성과 매력을 상태 창에 띄우듯이 만들어보고 싶었다. 아주 사소한 말에서 극까지 밀어붙이는 뚝심이 필요했던 작업이다. 계속 타협하며 이것 때문에 안 되고 저것 때문에 안 되고, 그러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나오기 마련이라 이런 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웃음)
Q : 그리고 일종의 리브랜드 필름인 ‘Be Your Own King’에서는 주연의 이미지를 다시 순진무구하게 뒤집어버린다.
A : 나는 반골 기질이 있다. 사람들이 “이거다” 하면 “그거 말고 다른 새로운 것도 있는데?” 하고 보여주고 싶다.(웃음) 우리 모두는 반대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게 단점이 될 수 있듯이, 단점이라고 여겼던 게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11명 모두 기존의 이미지를 반대로 뒤집었다. 섹시한 주연은 순진무구하게, ‘키라키라’한 뉴는 ‘매스큘린’하게, 성숙한 상현은 아이처럼 유쾌하게, ‘제너레이션 Z’에서 솔직하게 우울한 모습을 꺼낸 큐는 잘 놀고 독기 있고 쿨하게. 아이돌이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면 소모되기 쉽거든. 그래서 그들의 다른 모습을 찾아 입체적 인간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Q : 드라마 〈궁〉을 오마주해 영훈에게 곤룡포에 구형 휴대폰과 테디베어를 안겼을 때, 역시 노상윤이라는 말이 나오더라.(웃음)
A : 그건 오래도록 내 안에 박혀 있던 이미지였다. 영훈에게 찰떡같이 붙을 거란 확신이 들더라. 〈궁〉이나 〈엽기적인 그녀〉 같은, 나보다 앞선 세대의 드라마엔 묘한 매력이 있다.
Q : 어떻게 이미지를 잡나?
A : 우선 무드를 잡는다.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한 명 한 명씩 곱씹으며 머릿속에서 옷을 입히고 어울리는 이미지를 매칭한다. 그런 다음 그 애가 어떤 배경으로 어떤 빛에서 어떤 표정으로 걸어 들어올지 상상한다.
Q : NCT 127의 ‘Irregular Office’와 ‘Regular Dream’ 뮤직비디오에서 멤버들을 오피스 공간에 데려와 슈트를 입혔을 때, 반응이 뜨거웠다.
A : 이건 정말 팬들이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웃음) 그저 ‘NCT가 휘황찬란하고 아방가르드한 패션을 많이 선보였으니, 심플하고 담백하게 슈트를 입혀보자. 오피스로 가보자’ 그런 생각이었다.
Q : 누구나 한쪽에 가지고 있다는 오피스 판타지를 건드린 게 아닐까?
A : 정말 의도가 없었다!(웃음)
Q : 어찌 됐든 판타지를 굉장히 잘 구축하는 것 같다.
A : 내가 항상 듣는 말이 대상화를 잘한다는 말인데(웃음), 나는 그냥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매력적일까 고민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극강으로 꾸몄을 때 새로운 매력이 드러나고, 어떤 사람은 굉장히 어려운 환경 속에 있을 때 아름답겠다. 그렇게 어울리는 걸 찾아, 지금 내가 느끼는 것, 내가 보고 싶은 것을 향해 풀 액셀을 밟을 뿐.(웃음) 나는 끝장을 볼 때까지 달리는 성격이다.
Q : 첫 걸 그룹, 아이브의 작업은 어땠나? 〈LOVE DIVE〉부터 〈After LIKE〉까지, 자신만만한 소녀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A : 미성년자고 걸 그룹이기 때문에 대상화를 경계하면서 작업했다. 자신감 있고 화려하되, 대상화하지 않고, 지금 이 시기의 소녀들만이 뿜을 수 있는 걸 찾아내려 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자 아이돌의 성적 매력을 잘 끌어낸다는 타이틀이 있다 보니(웃음)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여자 스태프들과 “이거 위험해 보이진 않아?”라고 계속 체크해가며 작업했다. 사실 인간의 매력과 성적 매력은 무 자르듯 분리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을 셀링해야 하는 아이돌 산업에서 매력적으로 보이되 대상화되지는 않도록 비주얼을 만든다는 건 많은 숙고와 검토가 필요하다. 거기에 힘을 많이 쏟은 것 같다.
Q : ‘나르시시즘’이라는 콘셉트는 어떻게 살리려 했나?
A : 나는 나르시시즘은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옷을 입든 어떤 헤어 메이크업을 하든 어떤 세트에 있든 “내가 짱이야”라고 생각하는 태도. 멤버들에게도 늘 “그냥 너흰 짱이잖아?”라고 디렉션을 줬다. 그러면 그녀들은 “맞아, 짱이지” 하면서 세트장에서 즐겼다.(웃음)
Q : ‘써머필름’은 노상윤다운 작품이다. 정세랑 작가에게 직접 원고를 청탁해 멤버들에게 낭독시킨 점이 흥미롭다.
A : 아이브의 슈퍼스타 이미지나 콘셉추얼한 이미지를 잠시 내려놓고 지금 이때만 할 수 있는 소녀의 이미지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소녀였던 적은 없다 보니(웃음) 그 시기 소녀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잘 묘사해줄 사람을 생각하다 정세랑 작가님이 떠올랐다. 나는 정세랑 작가님 책을 정말 좋아한다. 그의 모든 책에서 위로를 얻었다. 사실 지금까지 나열한 모든 과정이 즐거운 순간도 있었지만, 많은 괴로움도 따랐다. 왜 나는 더 잘하지 못하지, 왜 이걸 못하게 하지, 왜 이 환경에서 누군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 그런 식으로 넘어야 하는 한계와 허들 사이에서 분투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불면증도 찾아왔고. 그때마다 위로가 된 게 정세랑 작가의 책이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세랑 작가님이 네 SNS 팔로한대”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웃음) 꼭 같이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브 작업을 함께 해서 너무 좋았지. 미팅 때 작가님 책을 이만큼 들고 가서 읽으며 밑줄 친 부분들을 보여드렸다.(웃음)
Q : 정세랑 작가의 글이 들어간 ‘‘I’ve Summer film’처럼, 나는 당신의 작품에 내러티브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한 장의 이미지라도 서사가 심어져 있다.
A : 비주얼 작업을 할 때 그 전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편이다. 지금 생각난 건데, ‘A to BOYZ’ 영훈 편은 옥탑방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였다. 옥탑방이 있는 건물의 건물주에게 허가를 받고 찍고 있었는데 옆 건물에서 한 아저씨가 화를 내며 올라오신 거다. 아저씨가 문을 쾅 치면서 고함을 질러 수습하면서 죄송하다, 죄송하다 그랬는데, 영훈에게 “저 아저씨가 너의 사장님인 거야”라고 디렉션을 줬던 기억이 난다.(웃음) 그들은 아무래도 그런 환경에 노출된 경험이 적으니까.
Q : 레퍼런스를 어떻게 찾나?
A : 캡처를 정말 많이 한다. 이미지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 지금 이 맥북에도 영화와 뮤직비디오, 패션 필름, 광고, 예능, 각종 영상 캡처를 수만 장은 모아뒀다. 유튜브나 비메오에도 아카이빙한 목록이 있고, 휴대폰, 맥북, 외장하드마다 산더미다. 평소에 인상적인 풍경을 보면 스냅도 많이 찍고. 이미지 저장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다.(웃음) OTT도 넷플릭스, 애플TV+, 디즈니플러스, 티빙, 왓챠, HBO 등 볼 수 있는 건 다 본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아카이브를 훑어보며 영감을 받는다. 세트일 때도 있고, 무드일 때도 있고, 어떤 빛일 때도 있고, 표정일 때도 있고, 단지 바이브일 때도 있고. 그래서 난 같은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생각한다.
Q : 스토리텔러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비주얼리스트한테 들으니 새롭다.
A : 이미 멋있는 건 형, 누나들이 많이 해놨다.(웃음) 그러니 나는 어떤 것과 어떤 게 만나면 더 좋겠다, 이 고전적인 이미지에 약간의 새로움을 더하자, 그런 아이디어를 내고 재조합하는 편집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Q : 요즘 꽂힌 레퍼런스는?
A : 역사. 조선왕조, 서양 중세사, 근대사, 다큐멘터리 위주로 역사 유튜버 콘텐츠도 챙겨 본다. 역사를 보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이탈리아에 다시 파시즘이 온 것처럼 역사는 반복되지 않나. 과거를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달까. 결론이 지어진 이야기니까 사람을 전지전능한 시점에서 보는 게 가능하고. 그래서 나는 사람이 궁금하면 SNS가 아니라 책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Q : 당신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나?
A : 역시 사람. 인류를 혐오하기도 하는데…(웃음) 싫어하는 건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자연은 일방향으로 흐르지만, 사람은 내가 눈짓을 보내면 그가 나를 본다. 추하면서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다.
Q : 최근 시선을 사로잡은 신선한 비주얼은?
A : HBO 드라마 〈유포리아〉. 시즌 1은 완벽했다. 촬영 미쳤고, 빛 미쳤고, 그들의 정키한 표정, 상처받은 표정, 환한 표정, 홀가분한 표정 등 모든 표정이 좋았다. 그걸 타이트하게 잡아내는 카메라도.
Q : 신경 쓰이는 비주얼이 있다면?
A : 나는 견제하지 않고 사랑해버린다. 팬이 된다. 힘겨루기 해봤자 소용없다. 한 수 꿇고 배워서 내 걸로 만들어야지. 그러므로 ‘존경하는’으로 바꾼다면, 샘 레빈슨 감독, 박찬욱 감독, 봉준호 감독. 나는 봉준호 감독도 〈마더〉나 〈괴물〉 〈기생충〉을 보면 굉장한 비주얼리스트라고 생각한다.
Q : 아이돌뿐 아니라 일반인도 피드 꾸리기에 여념이 없는 시대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이미지, 팔리는 이미지의 공통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A : 욕망. 사진마다 욕망이 들끓는다.(웃음) 나는 요즘의 모든 비주얼이 맥시멀리즘 같다. 온갖 마라탕이 나오고 있는데, 오히려 이런 시대이기에 이제 곧 샐러드 같은 심심한 맛이 다시 사랑받지 않을까?
Q : 여태까지 받은 작품 피드백 중에 인상적인 것은?
A : 오늘 기자님이 해준 말. 나는 내게 스토리가 없다고, 내가 경험한 것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지에 서사가 심어져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Q :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성장한 아티스트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A : 전우애. 나는 내가 작업을 맡으면 24시간 동안 아티스트 생각만 하고, 카메라 앞에서는 정말 사랑해버리지만, 일이 끝나면 선을 넘지 않는다. 안 친해진다. 카메라가 켜질 때만 우리는 둘도 없이 사랑하는 친구다.
Q : 카메라의 연인이네.
A : 이래 봬도 내향인이다.(웃음)
Q : 감독으로서의 야심은?
A : 늘 학생이고 싶다. 앞으로 아이돌 작업 외에도 미니 드라마, 사진,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할 거다. 계속 낯선 곳에 있고 싶고 거기서 안간힘을 다해 배우고 흡수해내고 방출하고 싶다. 인생을 살면서 오만해지지도, 지쳐 쓰러지지도 않고, 고이지도, 썩지도 않고, 계속 배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Q : 당신은 뭘 멋지다고 생각하나?
A : 말 많이 안 하는 거.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 그런데 오늘 너무 많이 해버렸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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