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일곱에도 길을 걷고 글을 씁니다
[김현진 기자]
나는 그 거리가 꽤 자주 나를 위한 작품을, 끝없이 이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내가 꺼내 보고 또 꺼내 보는 반짝이는 경험의 빛을 탄생시킨다는 걸 깨달았다. 거리는 내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내게 해준다. 거리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11쪽,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서제인 옮김, 바다출판사)
낯선 이들이 걸어가며 말하고 몸짓을 드러내는 거리가 거대한 무대처럼 보일 때가 있다. 조명이 비치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조연들의 총출동이라고. 그들을 바라보며 각자가 해내는 역할의 무게를 가늠해보다 혼자 외롭던 마음에 뭉클한 위로를 얻은 적이 있다. 사람들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 곁에 있어 힘이 났다.
모두가 저마다의 공연을 펼쳐 보이는 거리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고 "내 삶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도록 일깨워준다"(46쪽)고 비비언 고닉은 말한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혼자일 때가 가장 외롭지 않다"고.
비비언 고닉의 문장은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타인의 뒷모습을 보며 누군가를 떠올리고,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걷는 연인을 보며 언젠가의 나와 당신을 회상했다. 집이라는 안온하지만 단절된 공간에서 알 수 없는 외로움에 시달리던 마음은 거리를 걷고 타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흩어져버렸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타인과 낯선 세계와 조우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내면이란 광대한 우주 같다.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미개척지가 여전히 드넓게 남아 있는 곳. 어딘가에 부딪히고 통과하면서 비로소 그 일면이 간신히 드러난다. 타인과의 연결, 낯선 세계와의 마주침이 자아를 발굴하게 한다. 나를 아는 일은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깊어진다.
▲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
ⓒ 바다출판사 |
올해 여든일곱인 그녀는 여전히 작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의 저서가 2021년(<사나운 애착>, 글항아리)과 2022년(<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바다출판사)에 출간되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는 결혼과 이혼, 사랑과 우정, 페미니즘, 관계와 대화, 고독과 외로움 등,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과 거기서 발생하는 감정에 대해 탐구하고 질문했던 저자의 긴 보고서다. 그는 자신과의 긴밀한 연결을 위해 내면의 바닥으로 침잠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이해 불가능한 존재, 그 내면의 동굴에서 포착한 어둡고 음울하며, 씁쓸하고 절망적인 벽화를 세련된 언어와 풍부한 은유로 길어 올린다.
그녀는 긴 시간 결혼과 관계, 외로움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 왔다. "힘겨운 진실을 꾸준히 바라볼 때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61쪽) 진다고 그녀는 말한다. "페이지들을 써 내려가고, 문장들을 늘리고, 생각들을 집어넣으면서"(74쪽) 그녀는 "구원받지는 않더라도 새로워진다고"(74쪽) 느낀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타인과의 교감 속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얻는다. 그러면서도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으로 온전하길 바란다. 그 모순적 관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필요한 일은 '나 자신과 가까워지기'이다.
웨스트 빌리지의 임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고닉은 산책가(걷는 사람)로 유명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걸어야 할 운명"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등장한다. 그녀는 이혼 이후 혼자 살면서 자신에게 불안과 우울이 지속적으로 찾아왔고, 그것의 이름이 외로움이라는 걸 알게 된다. 어느 날 5km 정도의 거리를 걸으면서 음울하고 탁했던 감정이 정화되는 걸 경험한 그녀는 그걸 잊지 않고자 날마다 걷기로 다짐한다.
각자의 삶에도 원치 않는 감정이나 패턴이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비비언 고닉의 말을 따르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 때로는 부정적인 감정을 수용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삶에는 필요하다.
날마다 노력하는 일은 내게 일종의 연결이 되었다. 연결되는 감각이란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강해진 나는 내가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자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생각을 할 때 나는 덜 외로워졌다. 내게는 나 자신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나 자신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60쪽)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비비언 고닉이 "통렬하고 심오하며 입속에서 쇠처럼 쓰디쓴 맛을 느끼면서 써낸 이야기"(128쪽)이다. 혼자이고 싶지만 연결을 갈망하고, 관계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또다시 누군가에게 초대받길 바라는 '자기 분열의 이야기'이기에. 나와 타인, 그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고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던 실패의 경험조차 그녀는 끈질기게 바라보며 그 속에 숨어 있는 구겨진 진실을 기어이 글로 꺼내 보인다.
책을 읽는 동안 그녀가 느꼈을 쇠처럼 쓰디쓴 맛이 들숨과 날숨을 따라 나의 입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관계 속에서 혼자이길, 또한 함께이길 갈망하는 모순과 자기 분열은 누구나 지니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외로움에 사로잡혀 무기력해지는 대신 날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일 것이다.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을 하고 스스로가 자신을 이해해주면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든든하고 진실된 친구를 얻을 수 있다. 나 자신이라는 믿음직한 친구를.
그분께 저는 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이 제가 할 투쟁이 되리라는 걸 배웠습니다. (164쪽)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그녀가 들었던 말이 비비언 고닉이 글을 쓰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외면과 내면의 교류 속에 일어나는 반향을 치밀하게 탐구하며, 누구보다 깊숙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그녀 삶이 이 책에 적혀 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에게 다가가려 애쓰는 글.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 자유롭게 살기 위해, 거리를 순례하고 사람들을 통과하며 자신을 만나길 멈추지 않는다. "계속 열려 있고, 유연하며, 계산적이지 않은 사람"(215쪽)이 되기 위해, 감정과 관계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 여든일곱의 그녀는 여전히 길을 걷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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