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 먹방 뒤 대박...줄서야 먹던 피자 접고 시집판다는 이곳

손민호 2022. 11. 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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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동네책방 산책① 시인의집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동네 책방 '시인의집'. 바다와 맞닿은 자리에 책방이 들어앉아 있다.
제주도 북동쪽 갯마을. 바다와 맞닿은 자리에 제주도 여행의 이유가 되는 명소가 숨어 있다. 요란한 테마파크도 아니고, 번드레한 호텔도 아니다. 요즘 젊은 세대가 열광한다는 인스타 명소는 더욱더 아니다. 얼추 100년 묵었다는 낡은 집을 고쳐 들어간 북 카페 ‘시인의집’. 제주올레 18코스를 걷다가 제주시 조천읍 조천초등학교 뒷골목을 지나면 나오는 동네 책방이다.

‘시인의집’은 이름처럼 시인이 하는 북 카페다. 2001년 등단한 손세실리아(59) 시인이 2011년 4월 처음 문을 열었다. 제주에 연고가 있어 제주에 내려온 건 아니었다. 제주를 드나들다 제주에 꼭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제주에 살 만한 집이 나왔다는 걸 알고 2010년 저질러버렸다.

“조건은 세 가지였어요. 집이 싸야 하고, 마을 안에 있어야 하고, 바다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 이 세 조건에 모두 만족하는 집이었어요. 처음 집을 봤을 때 슬레이트 지붕이 맥없이 내려앉아 있더라고요. 흙벽으로 올린 집은 뼈대만 앙상했고요. 다른 사람은 무섭다고 할 만큼 폐가였지만, 난 너무 좋았어요.”

'시인의집'의 주인 손세실리아 시인.

처음에는 그냥 동네 카페였다. 벽마다 책이 꽂혀 있었지만, 시인 개인 소유의 책으로 판매용이 아니었다. 제주에 내려와 살 생각으로 마련한 집이었으므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소일 삼아 커피 내리고 피자를 구웠다.

아는 사람만 드나들던 한적한 동네 카페에 일대 반전이 일어난 건 2013년이었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TV 예능프로그램에 ‘시인의집’이 제주의 숨은 피자 맛집으로 소개됐다. ‘아빠 어디 가?’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가수 윤민수의 아들 윤후군의 ‘피자 먹방’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이 한갓진 골목은 온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카페 앞에 긴 줄이 섰고, 재료가 떨어져 피자를 못 팔게 되면 손님의 항의가 빗발쳤다. 말하자면 즐거운 비명이 터지던 시절, 시인은 뜻밖의 결심을 했다. 피자 장사를 접은 것이다.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내가 필요한 건 돈이 아니었어요. 휴식과 위안이 필요해 제주로 내려왔는데 이렇게 시달리며 살기 싫었어요. 어렵게 마련한 이 공간에도 맞지 않았어요. 피자를 팔던 시절 자주 아팠고, 무엇보다 시가 오지 않았어요.”

'시인의집'은 100년 묵은 폐가에 들어선 동네 책방이다.

피자를 그만 굽는 대신 책을 팔기로 했다. 카페에 꽂아뒀던 시인의 책을 집어 읽는 손님들을 유심히 지켜보다 “내가 좋은 책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카페 주인이 시인이니 시집이 제일 많았다. 친분 있는 시인에게 연락해 저자 친필 사인도 부탁했다. 틈틈이 북 콘서트나 저자와의 만남 같은 행사도 열었다. 정희성, 이병률 시인은 시집 완독회를 하기도 했다. 시인과 독자가 시집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나니 시인이 더 감동했단다.

'시인의집'은 저자 사인본 책이 가장 많은 책방이다.
곽재구 시인이 시집에 손으로 쓴 사인과 글. '시인의집'에 곽재구 시인의 친필 사인 시집 100권이 있는데, 100권 모두 쓴 글이 다르다.

이제 ‘시인의집’은 저자 친필 사인본 책을 전문으로 파는 거의 유일한 책방으로 거듭났다. 현재 ‘시인의집’에는 300∼400종의 책이 있는데, 이 중에서 문학 서적이 85∼90%이고 문학 서적 중에서 시집이 90%다. ‘시인의집’에서 판매 중인 책은 저자가 고인이거나 외국인이 아닌 이상 모두 저자 사인본이다.

“일단 내가 좋은 책을 고르고 저자나 출판사에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그러면 모두 정성껏 사인해서 보내줍니다. 곽재구 시인은 시집 100권에 각기 다른 사인을 해줬어요. 한 번 주문할 때 50권, 100권씩 대량 주문합니다. 하나같이 좋은 책이니까 언젠가는 다 팔릴 겁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주문 판매가 부쩍 늘었다. 한 번 ‘시인의집’을 들른 손님이 제주에 못 내려와도 굳이 ‘시인의집’에 연락해 책을 주문해서다. 시인도 저자 사인본 책 꾸러미를 만들었다. 다섯 권 안팎의 책을 마음대로 골라 한 묶음으로 판다. 말하자면 손세실리아 시인의 큐레이션 묶음 책이다. 시인은 “꾸러미 주문이 활성화해 지금은 현장 매출보다 주문 매출이 더 많다”고 말했다.

'시인의집'의 창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이어진다.
바닷가에서 바라본 '시인의집'.

처음에는 시인 혼자 북 카페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딸 오율(31)씨가 곁에 있다. 간호사가 꿈이었던 딸이 제주에서 혼자 지내는 엄마를 돕겠다고 내려왔다. 북 카페 업무도 분장이 잘 됐다. 엄마는 책을, 딸은 카페를 주로 맡는다. 딸이 엄마를 닮아 손이 야무지다. 과일 청도 잘 내리고, 아보카도 브레드 같은 새 메뉴도 곧잘 만들어낸다. ‘시인의집’에서 책을 사면 시 한 수를 손으로 쓴 종이를 끼워주는데, 이 단정한 필체의 주인공이 딸이다. 오씨는 “시와 친해지고 싶어 시를 베껴 쓰기 시작했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카페 일을 하는 딸을 지켜보던 시인은 지난해 딸을 공동대표로 올려줬다.

시인은 올 8월 제주 동네책방 네트워크 초대 대표에 선임됐다. 제주 동네 책방들의 모임이 있긴 했지만, 공식 총회를 거쳐 정식 대표에 오른 건 손 시인이 처음이다. 제주에서 북 카페를 한 지 벌써 12년째인 데다, 제주 동네 책방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마당이어서 책방 주인들의 추천과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단다.

“현재 네트워크에는 책방 22곳이 가입돼 있습니다. 거의 모든 책방 주인이 이주민입니다. 서로 도우며 제주 문화를 바꾸고 있습니다. 이달 말까지 제주 동네 책방 19곳에서 ‘제주산책_冊’이란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방마다 각자 형편에 맞게 기념품을 제작하거나 북 콘서트를 엽니다. 책과 함께하는 여행만큼 값진 여행도 없습니다. 제주에 오시면 책을 읽으세요.”

드론으로 촬영한 '시인의집'. 손세실리아 시인이 책을 읽고 있다.

제주=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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