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영부인은 안하겠다"...백팩에 운동화 '밀레니얼 영부인' [후후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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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팩을 메고 운동화를 신은 그의 한 손엔 커피가 들려 있다. 여느 30대의 출근길 모습 같지만, 신호등에 잠시 멈춰 선 그에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의 정체는 칠레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 이리나 카라마노스(33). 인류학자이자 정치활동가인 그는 경호는 받지만, 전용차는 타지 않고 걸어서 출퇴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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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의 제도적 역할 폐지"
지난 3월 보리치 대통령의 취임 이후 영부인 역할을 했던 카라마노스는 지난달 초 기자회견을 열고 파격적 발표를 했다.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영부인의 제도적 역할은 이제 끝났다"며 "영부인 역할을 개혁한다"고 했다. "영부인도 자율적인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가 제시한 개혁안은 재단 6곳 운영과 어린이 보육 네트워크, 여성 개발 단체 감독 등 기존 영부인의 업무를 정부 부처로 이관한다는 게 골자다.
그는 대통령궁 내 영부인 집무실의 문도 닫겠다고 했다. 이전 영부인들의 집무실 생화 장식에만 한 달에 2000달러(약 267만원) 넘게 들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카라마노스는 보리치 대통령의 공식 행사와 해외 방문 일정에 일절 동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영부인의 거의 모든 공식적 역할을 폐지한 셈이다.
카라마노스는 제도 개혁까지 나선 이유에 대해 "제도 개편으로 미래 영부인들 역시 영부인직의 부담을 떠안지 않길 원했다"고 밝혔다. 나아가 그는 "칠레뿐 아니라, 전 세계가 영부인의 역할을 개편하길 희망한다"고도 했다. 그는 현재 직접 관계 각료들을 설득하고, 회의를 통해 업무 이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밀레니얼 커플'이 선택한 대통령 관저
카라마노스는 현재 산티아고에 있는 융가이에서 보리치 대통령과 함께 살고 있다. 칠레는 대통령 관저가 따로 없고, 대통령들이 각자 살 곳을 정한다. 역대 칠레 대통령들은 보통 치안이 좋고 부유한 동네에서 살아왔지만, 보리치 대통령은 정반대 선택을 했다.
융가이는 빈곤율과 범죄율이 높은 지역으로 주택 대부분이 낡고, 대낮에 마약 갱단들이 구역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보리치 대통령은 이 지역을 택한 이유에 대해 "범죄자들에게 위협받는 지역을 복구하고 싶다"고 밝혔다.
실제로 보리치 대통령이 이사 온 후 융가이의 식당·카페 등이 사람들로 북적이며 활기를 띠게 됐고, 경찰 순찰이 늘면서 범죄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학생운동가 출신 좌파 성향의 국회의원이었던 보리치는 지난해 12월 55.9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카라마노스는 보리치의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하다. 그는 2016년 정치 운동을 시작했으며, 2019년 보리치가 속한 좌파연합의 일부인 사회통합당에서 페미니스트 분야를 이끌었다.
2019년 일로 만난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같은 해 극심한 빈부 격차와 불평등한 사회 시스템에 항의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칠레 전역을 휩쓸었고, 이런 정치적 혼돈 속에서 보리치는 대선 주자로 급부상했다.
카라마노스는 보리치가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선거 캠페인도 적극 도왔다고 BBC 등은 전했다.
4개국어 능통...'역할 개혁' 찬반 논쟁
카라마노스는 이민자의 딸로 1989년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계 우루과이인으로 번역가였고, 그가 8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리스계 교사였다.
이런 성장 환경의 영향으로 카라마노스는 영어·스페인어·독일어·그리스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인류학과 교육과학을 전공했다.
카라마노스의 '영부인 역할 폐지' 결정에 곱지 않은 시선도 있는 게 사실이다. WP에 따르면 칠레의 한 시민은 "영부인 역할을 원하지 않았다면, 대통령 후보의 파트너가 되는 것을 선택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영부인 역할을 없애지 말고, 현대화하라", "우린 (대통령을 선출했지) 당신을 뽑지 않았는데, 왜 당신 마음대로 영부인직을 개혁하는가"란 지적도 나왔다.
보리치의 낮은 지지율도 영부인 역할을 없앤 카라마노스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과거 군부 정권 시절 만들어진 헌법을 대체하기 위해 보리치가 추진한 개헌안이 지난 9월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이후 보리치의 지지율은 30% 안팎으로 떨어졌다. 카라마노스는 거리에서 만난 여성들로부터 "대통령을 좀 챙겨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또 일각에선 카라마노스가 지지자들의 비판에 떠밀려 뒤늦게 영부인직 개혁에 나섰다고 지적한다. 그는 지난 1월 "영부인의 역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서 "다만 현대적이고, 페미니스트 방식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여성단체들은 "페미니스트인 그가 영부인 역할을 수락한 건 모순이다", "카라마노스는 대통령과의 사적인 관계를 통해 얻은 역할을 수락했다"며 비판을 쏟아냈다.
일하는 영부인 누구..."역할 개혁 이례적"
WP는 '내조형 영부인'의 표준은 미국에서 등장해 세계 여러 나라로 확산했다고 설명했다.
미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1809∼1817년)의 배우자 돌리 매디슨이 내조하는 영부인의 모습을 대중에 처음 보이기 시작했으며, 존 F. 케네디(1961∼1963) 대통령의 배우자 재클린 케네디는 내조형 영부인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매체는 전했다.
카라마노스는 영부인직 폐지 후 이해충돌을 피해 교육 관련 연구직 종사를 결정했다고 한다.
카라마노스 이외에도 직업을 유지한 영부인들은 있다. 질 바이든은 미국 최초의 '일하는 영부인'이다. 그는 백악관 입성 후에도 교사 일을 계속했다.
멕시코 영부인 베아트리스 구티에레스 뮐러도 대학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뮐러는 "남편이 직업을 바꿨다고 내 직장까지 떠날 필요가 있느냐"고 말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의 동거인이자 영부인 역할을 했던 발레리 트리에르바일레도 기자 직업을 유지했다.
그러나 외신은 카라마노스가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사실상 영부인 역할을 폐지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캐서린 젤리슨 미 오하이오대 교수는 "그의 노력은 정치적 폭발력이 있을 것"이라며 "칠레가 (영부인 역할 개혁의) 길을 열었다"고 진단했다.
'밀레니얼 영부인' 카라마노스는 영부인 역할을 강요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응수한다. "힘 있는 남자 곁엔 여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깨고 싶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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