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몸을 쓰는 일

2022. 11. 19.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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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소리지만, 자랑 하나 하자면 나는 어릴 적부터 머리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생각을 그만두고 회개하게 된 계기는 스스로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 병이 나고부터다.

회사를 그만두고 책 다루는 일을 배우면서 나는 머리와 몸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해 보면 책 쓰기는 온몸을 밀고 나가면서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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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부끄러운 소리지만, 자랑 하나 하자면 나는 어릴 적부터 머리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담임선생님이 방학 동안 천천히 풀어보라면서 칠판에 거북이 등껍질 모양의 도형을 그렸다. 선생님은 등껍질 안에 숫자 몇 개를 썼다. 나머지 빈 곳에 들어갈 숫자가 무엇인지 생각해서 채워 넣는 게 숙제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칠판에 그려진 도형과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 아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거북이 그림이 ‘마방진’의 한 종류라는 걸 알 턱이 없는 우리는 맥락도 없이 아무 숫자나 대입해 보면서 우연히 뭔가 얻어걸리기를 바랐다. 나 역시 마방진을 몰랐지만 선생님이 써 준 숫자와 도형 사이에는 어떤 규칙이 있다는 걸 예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숫자와 도형 사이에 존재하는 규칙을 깨닫고 거북이 등껍질 빈 곳에 숫자를 채워 넣었다. 같이 있던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퇴근하려던 선생님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무슨 일인지 보려고 교실로 돌아왔다. 칠판에 정답이 그려진 것을 보고 선생님은 깜짝 놀랐다. 방학을 마치고 나자 나는 머리 좋은 학생으로 전교에 소문이 나 있었다.

우쭐해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뽐내며 살았다. 첨단기술을 사용하는 IT 회사에서 일하는 게 자랑스러웠다. 한편으로 육체노동 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얕잡아보는 못된 마음도 생겼다.

그런 생각을 그만두고 회개하게 된 계기는 스스로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 병이 나고부터다. 일하며 몸을 거의 쓰지 않아서 허리와 목의 디스크가 터졌고 체중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었다. 월급이 많으면 뭐 하나. 그 돈 거의 전부가 병원비로 들어갔다.

그동안 내가 똑똑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회사를 그만두고 책 다루는 일을 배우면서 나는 머리와 몸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책을 쓰는 작가의 일 역시 머리만으로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직접 책을 써보고서야 알았다.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해 보면 책 쓰기는 온몸을 밀고 나가면서 해야 할 일이었다.

헌책방 일은 내게 많은 걸 알게 해줬지만 그중 단연 귀한 가르침은 몸 쓰는 일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책방에서 일한다고 “그러면 책을 많이 읽어서 머리가 좋으시겠네요”라고 말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물론 책을 많이 읽지만 그게 꼭 똑똑함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무언가를 머리로 알아서 똑똑해지는 것과 그것을 몸으로 드러내 실천하는 일은 별개가 아니다. 어쩌면 실천 쪽이 더 어렵고 용기가 필요하다. 그동안 나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살았다. 가게에 가득 쌓인 무거운 책을 옮기면서 나는 매번 새롭게 다짐한다. 바로 이렇게.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내면 진짜로 아는 게 아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며 살 것인지 힘껏 고민해야겠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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