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가치’와 ‘국익’ 사이…좌표 못 찾는 尹 ‘가치외교’
가나·바레인·르완다·리비아·모잠비크·예멘·카메룬·콩고…, 그리고 한국.
지난 16일(현지시간)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서 채택된 ‘크림반도 인권결의안’에 기권한 국가들이다. 우크라이나가 발의한 이 결의안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을 비판하고, 병합 이후의 인권 침해 및 러시아군 주둔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 78개국의 찬성과 14개국의 반대 속 79개국은 기권했는데, 내전과 학살 등 각종 분쟁과 인권 탄압으로 비난받는 국가들이 주를 이룬 기권국에 한국이 포함됐다.
의아한 일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5월 출범 이후 줄곧 ‘가치외교’를 강조했다. 인권·자유·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외교를 추구하겠다는 게 윤 대통령의 취임 일성이었다. 지난 9월 유엔총회 기조연설의 핵심 주제 역시 “자유 수호를 위한 국제사회 연대”였다. 하지만 이번 결의안 기권은 인권·자유 수호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국제사회와의 연대 약속을 스스로 허무는 선택이었다. 윤석열식 가치 외교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갈지자 행보 멈춰야"
외교부는 지난 17일 기자들에게 크림반도 인권 결의안에 기권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결의안에 인권 외에 정치·군사적 내용이 담겼고 ▶흑백 이분법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회색 지대’에 있는 결의안이었으며 ▶찬성한 국가보다 기권한 국가가 더 많다는 이유를 들어 기권표가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외교부 입장은 결국 이번 결의안에 크림반도 병합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 침공을 위해 크림반도에 주둔한 러시아군의 철군을 요구하는 등 인권과 무관한 정치·군사적 내용이 담겼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기권국이 더 많다" 궁색한 해명
특히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의 경우 한국은 과거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사안이다. 외교부는 2013년 3월 19일 대변인 명의 성명을 통해 크림 병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우크라이나의 주권, 영토 보전과 독립은 반드시 존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기권국이 찬성국보다 많다는 설명 역시 궁색하다. 자칫 한국 정부는 얼마나 많은 국가가 동의하는지에 따라 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과 개입 여부를 달리한다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 더구나 기권국의 경우 인권·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국가들이 많은 반면, 미국·프랑스·영국·독일·호주·캐나다 등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서방 국가들은 대부분 찬성표를 던졌다.
중·러엔 적용되지 않는 '가치외교'
가치 외교는 말하긴 쉬워도 지키긴 어려운 목표다. 인권을 수호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는 건 당장의 국익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문재인 정부가 '남북 관계 개선'을 앞세워 3년 연속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 불참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부에 주어진 선택지는 가치 외교를 강조한 만큼 실제 행동 역시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거나, 가치 외교의 강도 자체를 낮추는 일이다.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면 국익을 추구하는 실용 외교와 인권을 중시하는 가치외교 사이의 절충점을 찾아 명확한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 말로는 인권을 외치지만 실제론 결의안 기권이나 규탄 성명에 불참하는 모습이 반복된다면 가치 외교의 진정성 자체가 의심받게 된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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