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킹] 특급호텔·청와대 책임진 베테랑 셰프가 평창으로 향한 이유는

송정 2022. 11. 1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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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그렇지만, 특히 외식업계에서 시간은 가치와 직결된다. 오랜 시간 변함없이 사랑받는 노포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 부침이 심하고 변화가 빠른 업계다 보니, 그 세월을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셰프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지난 10월 휘닉스 호텔앤드리조트의 총조리장으로 부임한 신충진(65) 상무는 50년 동안 주방을 지켰다. 특급호텔과 청와대 등 셰프라면 누구나 꿈꾸는 곳이다. 그는 “요리는 내 몸에 맞는 옷처럼 잘 맞았고, 그래서인지 늘 궁금하고 욕심이 생기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50년 경력의 신충진 총조리장. 사진 휘닉스호텔앤드리조트

신 총조리장이 요리업계에 발을 디딘 1973년은 셰프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환경도 지금과 크게 달랐다. 신 셰프는 “요리를 배우는 게 무엇보다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인터넷창만 열어도 국내외 레시피가 쏟아지지만 당시엔 제대로 된 요리책 찾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외국서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귀했다. 한 달에 하루 쉬는 날이면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범한서적에 가서 요리책을 찾아봤다. 당시에도 수많은 외국서 중에 요리책은 단 세권뿐이었다고.

“세권 중에서 한권을 골라 들었는데 가격이 1만5000원이었어요. 서양 요리를 다룬 책이어서 정말 갖고 싶었죠. 하지만 당시 제 월급보다 비싸서 포기하고 그냥 나오려는데, 사장님이 불러세우셔서 왜 그냥 가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돈이 3000원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 돈만 내고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다른 요리책은 후배들에게 나눠줬는데 이책만은 줄 수가 없더라고요.”

신충진 총조리장이 70년대 서점에서 구입한 서양요리책. 사진 신충진


이후에도 해외 출장 가는 동료에게 요리책을 부탁했고, 그렇게 가져온 요리책을 함께 보며 공부했다. 신라호텔에 근무하던 85년엔 최수근 경희대 명예교수의 제안으로 A.C.F라는 연구 모임을 결성해, 조선·롯데·하얏트 등 서울 시내 특급호텔 셰프들과 함께 식재료와 소스를 공부했다. 그리고 함께 현장에서 통용되는 레시피를 담아 88년『소스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냈다. 엉터리로 번역된 요리책이 많았던 시절 나온 이 책은 호텔 현장에서 사용하는 내용이 담겨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후배들에게 필독서로 자리하고 있다.

근무를 마치고 밤에 모여 함께 공부한 당시 서울시내 특급호텔 셰프들,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신충진 총조리장이다. 사진 신충진

그의 이력 중 눈에 띄는 건 청와대 셰프다. 참여정부 시절 5년 동안 대통령의 식사와 대통령이 주관하는 국빈 만찬을 비롯한 대·소연회 준비를 총괄하는 운영관으로 일했다. 함께한 시간만큼 추억도 많을 텐데, 그는 말을 아꼈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걱정돼, 그동안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도 거절해왔다. 하지만 셰프로서 가장 보람된 순간을 묻자 노무현 대통령에게 인정받았던 순간을 꼽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보람이 컸다고.

“대통령께선 5년 동안 한 번도 어떤 음식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죠. 전문가로서의 저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셨어요. 무엇보다 음식을 귀하게 여기셨어요.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 하셨고, 비운 반찬 그릇은 채우지 못하게 하셨죠. 더 갖다 주면 남기게 되고, 남기면 결국 버리게 되니까요.”

청와대를 나와 제주신라호텔의 총주방장을 역임한 후, 켄싱턴 제주호텔과 서울드래곤시티호텔의 조리이사로 현장을 지켰다. 하지만 2020년 잠시 현장을 떠나 가족과의 시간을 선택했다. 수년간 휴일 없이 손님을 위해 요리했지만, 정작 가족을 위해 요리한 시간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는 “텃밭을 가꾸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몸은 편했지만, 마음속엔 요리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F&B 트렌드를 공부하기 위해 떠났던 일본 오사카 여행 당시의 모습. 사진 신충진


결국 올해 10월 휘닉스호텔앤드리조트의 총조리장으로 현장에 복귀했다. 50년차 베테랑 셰프는 음식을 만들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까. 신 총조리장은 ‘음식을 먹는 사람’을 꼽았다. 당연한 얘기같지만 요리를 하다보면 셰프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기 쉽고 무엇보다 온라인 너머의 화려한 비주얼에 빠져 요리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음식을 먹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맛과 양, 온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이도 취향도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휘닉스호텔앤드리조트의 총조리장으로서의 각오역시 사람에 무게를 두었다.

“요즘은 사람들이 호텔이나 리조트를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식음업장의 수준입니다. 음식의 맛이나 공간의 분위기, 여기에 위생 등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써야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어요. 휘닉스호텔앤드리조트는 곧 시작될 겨울 스키시즌, 이곳을 찾는 고객 누구나 인정할 맛과 사진에 담고 싶은 비주얼의 요리, 직원들의 세심한 응대로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송정 기자 song.jeog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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