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미의 영화로 보는 세상] 엄혹한 시대에 대한 메시지

데스크 2022. 11. 17. 14: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화 ‘파이어버드’

슬라브 민담에는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있다. 우리나라 민담에 등장하는 용(龍)과 같은 상상의 동물 ‘불새’(fire bird)다. ‘이반 왕자와 불새’에서는 사냥하다 길을 잃은 왕자가 마왕의 정원에서 불새를 잡았으나 자비심에 놓아주게 되고 왕자가 마법에 걸려드는 순간 불새의 도움으로 마왕을 죽이고 공주를 구해 결혼한다는 내용이다. 러시아 출신의 스트라빈스키는 슬라브 민담에 나오는 불새를 모티브로 20세기 발레 음악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불새’를 만들었다.


슬라브 민담에서 비롯된 스트라빈스키의 명곡은 최근 개봉한 영화 ‘파이어버드’와 자연스럽게 맞닿아있다. 행운과 고통을 함께 준다는 불새, 영화 속 주인공들은 ‘불새’ 공연을 함께 보며 그들에게 잠재되었던 열정과 사랑을 깨닫게 되지만 억압된 소련 체제 하에서 노출된 그들의 사랑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이 행복해질 수 없었다.


1977년 냉전 시대의 에스토니아 공군기지에서 복무 중이던 젊은 병사 세르게이(톰 브라이어 분)는 새로 온 전투기 조종사 로만 중위(올렉 자고로드니 분)에게 첫눈에 이끌린다. 사진이라는 공통의 취미로 두 사람은 마음을 열고 가까워진다. 삭막한 군대 생활 속에서 둘은 공연을 함께 보는가 하면 예술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대를 쌓는다. 결국, 위태롭게 선을 넘나들던 두 남자는 모든 게 금지된 시대에 위험한 사랑을 시작한다.


영화는 엄혹한 냉전 시대의 공기를 전한다. 1977년은 미국이 중성자탄의 유럽 배치를 검토하고 소련이 중거리 탄도미사일 SS-20을 배치하면서 핵무기 경쟁이 다시 격화되던 시기다. 더군다나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1980년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양측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두 번째 냉전이 시작되었다. 최전방 소련의 군사기지에서는 일상이 감시 대상이다. 부대 내 정보책임자인 소령은 전투기 조종사로 온 중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국가보안위원회에 알린다. 감시 속에서 세르게이와 로만의 사생활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당시 경직된 소련체제 아래 그들의 만남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을 떠난 로만은 추락사고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면서 영화는 소련체제가 지닌 구조적 한계와 엄혹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비극적 로맨스를 통해 러시아 성소수자들의 현실을 알린다. 영화는 배우이나 시나리오작가인 세르게이의 실제 회고록 ‘로만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13세 학창시절 세르게이에게는 절친 디마가 있었다. 디마의 아버지가 세르게이가 쓴 편지를 읽고 호모는 안된다며 아들을 구타했고 그 뒤로 디마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아픈 추억이 있다. 성인이 된 세르게이는 로만 중위와 가까워지고, 로만 중위를 감시하던 소령은 로만에게 형법 제121조를 말하면서 동성 간의 성적인 관계는 5년간 수용소에 수감돼 처벌 받는다고 고지한다. 소련 붕괴 후, 이 법은 1993년에 폐지되었지만 2013년 ‘반동성애 선전법’이란 이름으로 부활한다. 러시아에는 성소수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학대와 차별을 받고 있다. 영화는 시대적 강요에 의해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을 고백하며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에 존재한다는 것과 동성애자에 대한 인권 탄압을 비판한다.


세계는 냉전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있으며 중국 또한 시진핑 체제가 구축되면서 세계는 권위주의와 큰 정부 추세로 전환되고 있다. 에스토니아 출신이자 실제 동성애자인 피터 리베인 감독은 세르게이의 이야기를 통해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진실하게 포착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 ‘파이어버드’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퀴어영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냉전시대의 엄혹한 분위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양경미 /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