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시간의 드리블보다 축구에 더 필요한 한 가지 [언젠가 축구왕]

이지은 2022. 11. 1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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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반성하는 복기의 시간이 나를 기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이지은 기자]

가을은 축구하기 좋은 계절이다. 나는 아직 겨울 축구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나, 축구 선배인 친구들은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잘 안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시간, 공을 차다가도 자꾸만 고개를 들어 맑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 나날. 축구는 이런 계절을 더 깊이 사랑하게끔 만든다.

'리뷰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 몸 푸는 친구들 시합 전에 일렬로 서서 몸을 풀고 있다.
ⓒ 오정훈
우리 팀은 '추워지기 전에 바짝 놀아야 한다'는 사명 아래 친선 경기와 풋살 대회 일정을 연이어 잡았다. 토요일마다 경기들이 대기 중이고,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정규 수업을 함께한다. 그 사이사이에 가까이 사는 팀원들끼리 모여 개인 연습하는 열정까지 보인다.

줄줄이 사탕처럼 엮인 일정 공지를 보면 '이 정도면 집 처분하고 합숙소 차리는 편이 합리적이지 않나?' 싶은 마음까지 든다. 실제 가족들보다 더 오래 함께하니 이야말로 '또 하나의 가족' 아닌가.

여기에 일정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리뷰 수업'이다. 친선이든 대회 경기든 모든 장면은 영상으로 기록되는데, 한 달에 하루 정도는 코치님 주도 아래 그 영상을 분석한다. 서로의 잘한 플레이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좋았을 플레이를 나누는 시간. 바둑 기사들이 대국 후 바둑판 위에 바둑돌이 지나간 자리를 다시 한 번 되짚는 그 '복기'의 시간을 우리도 가져보는 것이다.
 
▲ 영상 복기하는 시간 내 실수를 직면하는 시간을 우리는 가장 어려워한다
ⓒ 이지은
 
우리는 대체로 이 시간을 어려워한다. 모두가 빼곡히 모여 앉은 스튜디오에 불이 꺼지고 빔 프로젝터 홀로 밝게 빛나면 여기저기서 끙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화면에 큼직하게 등장하는 나는 그만큼 실수하는 장면도 거대하다.

지난 리뷰 때 자신의 실수 장면을 바라보던 쵬지는 "우리 대관 시간 언제 끝나? 불 안 꺼지나? 정전 안 되나?" 외치며 불편한 마음을 한껏 표현했다. 그렇다고 도망갈 곳은 없다. 자기 자리에 앉아 오롯이 실수를 직면해야 한다.

내 플레이가 영상에 잡히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다. 5분 또는 10분 만에 교체되는데다가 늘 공 근처가 아니라 저 멀리 화면 밖에 떨어져 있다. '대체 어디에서 혼자 달리고 있는 거지?' 싶을 때쯤 빼꼼 나타난다. 그럼에도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이는 코치님.

"멀찍이 있으니 패스가 다 잘리잖아요. 라인을 타고 있든가 수비 앞에 서야 해요."

"킥인(터치라인 바깥으로 공이 빠졌을 때 발로 차서 안으로 넣는 풋살 규칙) 욕심을 왜 내요? 공격수가 킥인 하면 공격 숫자가 하나 줄잖아요."

"골 하나 넣었다고 안 뛰네? 내 편이 저렇게 열심히 달리는데 같이 뛰어 들어가야죠."

계속 듣다 보면 '나는 대체 뭘 잘하는가' 싶어 조금씩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리뷰 시간에 참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경기 전체를 관망하는 눈이 부족한 나에게는 지난 영상을 혼자 감상하는 게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 가만히 앉아 경기 영상을 반복해 들여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만 든다.

'분명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어….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어!'

그럴 땐 그냥 머리 쥐어 싸매며 자괴감만 잔뜩 안고 잠자리로 향한다. '나는 왜 이렇게 못할까? 언제 잘하게 되나?'라는 쓸데없는 질문만 스스로에게 잔뜩 던지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그러니 나에게 복기란, 내 눈으로 미처 보이지 않는 어둠에 코치님이 빛 하나를 쏴주는 경험이다. 

수정해서 다시 제대로 시도하는 한 번의 슛
 
▲ 긴팔 유니폼 입은 뒷모습 가을이 왔고, 새 유니폼이 생겼다. 이번에는 12번이다
ⓒ 오정훈
흔히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이라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른바 '1만 시간의 법칙'이다. 1만 시간이라니. 출근도 해야 되고 밥도 먹고 잠도 자야 되는데 매일 3시간씩, 그것도 10년간 꾸준히 해야 축구가 내 것이 된다고? 지금 속도로는 쉰 살은 넘어야 축구 신동 소리 듣겠구먼.

그런데 이 법칙을 이야기할 때 간과되는 지점이 있다. 수정과 복기 작업 없이 계속 시간만 쌓으면 나중에는 몸에 새겨진 안 좋은 습관을 고칠 수도, 돌아갈 수도 없게 된다는 점이다.

한 축구 전문가에 따르면 "아예 초보면 오히려 나은데 유튜브 따라하다가 나쁜 습관 들여 오는 사람들이 가장 가르치기 곤란하다"고 한다. 바른 자세와 태도로 제대로 훈련해야 1만 시간이 빛을 발하는 것이지, 아니면 그냥 시간을 버린 거다. 언젠가 코치님은 슛 연습을 하는 나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건네었다.

"슛 연습을 시킬 때마다 고민이 들어요. '저 자세로 계속 연습하면 습관으로 굳을 텐데' 싶어 걱정스러운데 인원은 많고 시간이 없다 보니 하나하나 못 봐드리니까...."

제발 진정하라고, 네 멋대로 그만 쏘라는 말이다.

'1만 시간'만 바라보면 절대 축구왕에 도달할 수 없다. 초보인 나는 그저 어긋난 방향을 수시로 수정하며 바로 앞 한 단계씩만 밟아나갈 뿐이다. 지금 내겐 잘못된 자세로 드리블을 100번 치는 것보다, 드리블 영상을 복기하며 문제점을 찾고 수정해 다시 시도하는 한 번이 필요하다.

그러니 경기가 끝났다고 해서 축구가 끝났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친구들과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실수를 직면하는 그 시간을 1만 시간 법칙 안에 포함시켜야 마침내 축구왕에 도달할 수 있다. 언젠가 축구 친구들과 "인생은 이순(60)부터지. 환갑잔치할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이 농담이 사실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환갑의 가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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