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참을 수 없는 개발자의 순진함
최근 출시된 넷플릭스 영화 ‘그 남자, 좋은 간호사’는 수십명의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미국 연쇄살인자 찰스 컬런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제작됐다. 간호사인 컬런은 1987년부터 2003년까지 뉴저지와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10개 병원에서 근무하며 40명의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살해했다. 범행이 드러났을 때 컬런은 “환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컬런이 내세운 ‘선의’가 자행될 수 있던 배경에는 ‘시스템의 부재’가 있다. 컬런은 범행이 이뤄지는 동안 병원 측의 제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병원들은 그의 범행을 의심했지만 소송이나 논란에 대비해 부검이나 내부 조사를 하지 않았다. 단순히 컬런을 해고하고 사건을 무마했다. 병원이라는 시스템이 결함에 눈을 감고 악행을 방조하는 동안 ‘백의의 천사’는 ‘선한 의도를 가진 악마’가 됐다.
코로나19 백신패스 쿠브(COOV) 개발사 블록체인랩스가 최근 블록체인 기반 메신저를 출시하며 덧붙인 설명이 이 영화 속 병원들을 떠올리게 했다. 블록체인랩스는 “블록체인 ID와 연결 코드는 사용자가 대화를 원하는 사람 외에 그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아 ‘n번방 사건’과 같은 노출된 ID를 이용한 익명의 사이버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메신저 내용을 사후적으로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메신저에서의 대화는 악용될 가능성이 작다고 주장했다. 사후적 조작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에 이런 특성을 아는 이용자들은 대외적으로 유통되는 대화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메신저를 통한 대화는 일종의 ‘오염된 증거’로 통용되고, 이에 따라 캡처나 촬영을 통한 악의적 이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비방할 목적으로 메신저 내용을 조작해 유포하는 행위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 여겨진다. 상대방이 했던 말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거나 조작한 뒤 비방 목적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리면 진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상대방은 평판 등에 상당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사후적 수정이 가능하다면 이 메신저를 통해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가 일어나더라도 이를 증명할 결정적 증거로 메신저 대화 내용이 활용되지 못한다. 범죄 모의도 어느 순간 건전한 사적 대화로 둔갑할 수 있다.
여러 측면에서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지만, 블록체인랩스는 사람들이 메신저를 범죄에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의를 맹신하는 것 같다. 기자간담회 당시 블록체인랩스는 범죄 악용 소지가 있다는 반복적 질의에 “메신저 이용자들이 실제로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범죄 악용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이를 의식해 시장성 있는 기술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반문도 제기했다.
인간은 이기심이라는 본능 때문에 늘 선할 수만은 없다. 개인의 상황과 생각, 처지에 따라 얼마든지 선보다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선한 의도 역시 악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이를 막아주는 도구는 시스템이다. 규범과 도덕, 법질서 등 시스템이 제 역할을 한다면 인간은 공동체 속 선한 존재로 남을 수 있다. 시스템이 공공선을 위해 잘 구성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시스템적으로 악한 행위가 용인된 상황인데도 인간이 이를 악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개발자의 순진함인지, 무모한 자신감인지 의문이다. 이미 많은 IT서비스 개발자들이 서비스와 기술이 악용됐을 때 “이럴 의도는 없었다”는 해명을 반복했다. 악용한 이용자의 잘못이라면서 ‘시스템 창조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했다.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라고 주장하는 개발자들 사이에서 피해자들은 서비스를 이용한 죄를 지은 가해자로 남겨진다. 자신들이 개발한 서비스의 긍정적 가치를 주장하기에 앞서 개발자의 순진함이 세상에 미칠 파괴력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컬런의 선의를 용인했던 병원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전성필 산업부 기자 f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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