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정죄만으로는 비극을 막을 수 없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157명의 꽃다운 생명이 스러졌다. 스물네 살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하느님 저를 대신 데려가 주세요”라고 절규했다. 집단적 비극이지만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라는 서늘한 숙명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1995년 532명이 희생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014년 304명을 잃은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삼풍은 사업주가 4층 쇼핑센터로 짓다가 5층 백화점으로 바꿔 무리하게 구조를 변경했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였다. 개장 초기부터 붕괴의 전조(前兆)가 있었고 5년 만에 폭삭 주저앉았다.
세월호는 청해진해운이 일본에서 사들인 18년 된 중고 선박이었다. 노후한 전기배선이 합선돼 조리실과 천장 벽이 불탔고, 퇴역한 상태였다. 일본인들은 ‘선박대국’ 한국의 어이없는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배에 화물을 더 싣기 위해 ‘선박의 생명수’라는 평형수를 빼내고 위태롭게 떠다니다 침몰했다. 돈 때문에 생명을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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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참사, 삼풍·세월호와 닮아
정치적 이익 위해 물어뜯지 말고
인간의 존엄·안전이 우선하도록
용기 내어 구조적 부정의 고쳐야
」
그러더니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들이 압사당하는 참사까지 이태원에서 벌어졌다. 삼풍과 세월호처럼 예견된 사고였다. 사흘 전 간담회를 열었고, 10만이 넘는 인파의 밀집을 예상했다. 하지만 경찰과 구청은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도대체 국가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정부는 법적 책임을 규명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특별수사본부는 직무를 유기한 윗선은 놔두고 현장 실무자 6명을 피의자로 입건했다. 용산경찰서 정보계장은 극단적 선택을 했고, 일선 경찰과 소방관들은 “왜 최선을 다한 실무자에게만 책임을 묻느냐”고 반발하고 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
미국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은 “법적 책임에만 집중할 경우 누군가는 책임에서 면제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사회적 연결 모델’은 누군가를 처벌하거나 비난하는 ‘법적 책임 모델’과는 다르다. 행위에 영향을 미친 배경조건을 살펴 구조적 부정의(structural injustice)를 개선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과 시민이 행동에 나서야 가혹한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1755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리히터 8.5~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25만 인구 중 2만5000명이 죽고, 건물의 85%가 파괴됐다. 수백 차례의 여진이 계속되는 동안 예수회는 “인간의 타락과 방종에 대한 신(神)의 심판”이라고 했다. 마녀 사냥과 화형(火刑)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6년간 주(駐)영국 대사를 지내면서 합리주의에 눈뜬 카르발류 총리가 있었다. 그는 성직자의 기도가 아닌 엔지니어의 과학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그는 쌓인 시신에서 부패가 시작되자 “신성모독”이라는 예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를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 인류 최초의 지진 피해 전수조사를 실시했고, 지진에도 안전한 도시를 건설했다. 4층을 초과한 건물은 짓지 못하도록 했고 도로를 넓혀 유사시 대피할 수 있도록 했다. 귀족·성직자의 기득권과 싸워 과학과 합리의 시대를 열었다.
철학자 볼테르는 유럽을 각성시킨 초대형 베스트셀러 소설 『캉디드』를 발표했다. “신은 의롭다”는 라이프니츠의 신정론(神正論)을 “신이 큰 선(善)을 가져오기 위해 현실세계에서 악(惡)을 허용했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다. 유럽인들은 리스본 비극을 광신(狂信)에 맞선 세속주의(世俗主義) 시대를 여는 동력으로 전환했다.
삼풍, 세월호로도 모자라 이태원 참사까지 겪었으면 우리도 이젠 달라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다. 피 묻은 전리품을 챙기려고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다. 한쪽에서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이재명 수사 물타기’라고 맞불을 놓고 있다. 책임을 묻는 정죄(定罪)의 과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포리아(출구가 없는 난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재난에 눈감는 현재의 국가 시스템은 정의롭지 않다. 이 거대한 구조적 부정의는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용기 있는 자는 비겁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어야 한다.
삼풍 붕괴 사고 발생 21년이 지난 2016년 서울시 소방재난안전본부가 구조활동을 했던 소방관 40명을 상대로 물었더니 전원이 “대형 사고가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다.(『1995년 서울, 삼풍』 서울문화재단) ‘세월호 특별법’은 명칭에 ‘4·16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이라는 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안전사회 건설’을 다짐하면서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한 수사·감사·조사를 아홉 번 되풀이했지만 해상 사고는 오히려 두 배로 늘었다. 그러더니 이태원 참사가 터졌다. 누가 과연 진정한 범인인가.
법적 책임만 추궁하면 행위자는 처벌할 수 있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집단적 무책임성이라는 구조적 부정의를 고쳐야 한다. 또 다른 비극이 닥치기 전에 인간의 존엄과 생명, 안전이 최우선이 되는 공동체를 선포해야 한다. 18세기 리스본의 선각자는 있지도 않은 마녀를 색출해 산 채로 불태우는 아우토다페(화형)를 추방했다. 21세기의 한국도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는가.
이하경 주필·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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