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시시각각] 봉황은 좁쌀을 먹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길에 오른 지난 11일, 서울공항 대통령 전용기 출입문에 찍힌 봉황 두 마리가 선명했다. ‘새 중의 새’ 봉황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상징이다. 1967년 제정한 ‘대통령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표장’ 공고에 따라 봉황은 대통령의 표상이 됐다.
용산 대통령실은 이달부터 새 로고를 쓰고 있다. 봉황 두 마리가 대통령실 건물을 감싼 형상이다. 일각에선 봉황이 왕조시대 유산이기에 ‘용도 폐기’를 주장하지만, 이는 전통문화에 대한 몰이해에 가깝다. 오늘날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왕으로 여기는 이가 있을까. 국민의 대표에 대한 예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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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 봉황은 대통령 아닌 국민
통치자의 책무는 사회 갈등 조정
국민 마음 죽으면 앞날도 어두워
」
봉황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조선시대 군주의 등가물이었던 봉황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백성 속으로 내려왔다. 민화(民畵) 속 봉황이 특히 그랬다. 특히 문자도(文字圖)에서 봉황은 ‘청렴할 염(廉)’자와 함께 등장한다. 청빈한 성군, 어진 정치에 대한 바람이다. ‘봉황은 굶주려도 좁쌀을 쪼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경제력이 높아진 백성들의 자신감도 반영됐다.
21세기 민주사회에서 진짜 봉황은 국민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처럼 국민을 떠난 대통령은 존재할 수 없다. 대통령실도 새 봉황 로고에 대해 “국민의 뜻을 받들고, 국민을 위해 헌신하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민은 집단명사다. 통치자가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을 수없이 앞세워도 국민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각자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이해 조정 능력이 필수불가결인 이유다.
이번 순방길에 대통령실이 MBC 취재진의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조치는 이런 면에서 천 리를 날아간다는 ‘봉황의 뜻’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닌, 헌신하는 대통령이라면 설혹 정권에 달갑지 않은 보도도 수용하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대통령 전용기는 대통령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 아닌가. 그러잖아도 두 진영으로 동강 난 나라를 더욱 '웃기게' 만든 꼴이다. 대통령실 주장대로 ‘가짜 뉴스’가 걸린다면 관련법에 따라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 과거 정부에서도 유사 사례가 있었다는 일부 여권의 항변은 “네가 먼저 잘못했는데 우리가 무슨 문제”라는 식의 좁쌀 같은 마음만 드러낼 뿐이다.
윤 대통령이 순방을 떠나기 전날 밤, 이태원 참사 현장을 찾았다. 늦게나마 2주일 전 생명을 잃은 숱한 청춘들의 평화를 기원했다. 맘껏 날아보지 못하고 날개가 꺾인 ‘젊은 봉황’을 기리는 국화와 촛불, 음식과 추도문이 이태원역 1번 출구 근처를 뒤덮었다. ‘깃털 하나의 무게도 느끼지 말고 천사의 날개 달고 자유로우세요’라는 추념 문구에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졌다.
언제까지 슬픔에만 잠길 수 없다. 국가애도기간이 끝나고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이 진행 중이다. 경찰·구청·소방서 등 일선 기관들의 허술한 대응과 시스템 부재가 확인되고 있다. 한데 행정안전 최고책임자들의 거취는 여전히 논란이다. ‘메아 쿨파(Mea Culpa·나의 죄)’를, 즉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미룰수록 희생자와 유족, 나아가 국민의 상처만 더 커지지 않을까 싶다. 예부터 ‘마음이 죽는 것만큼 큰 슬픔은 없다(哀莫大於心死)’고 했다.
전윤호 시인의 신작 시집 『밤은 깊고 바다로 가는 길은』에 실린 ‘서울에서 20년'이 섬뜩하다.
‘마주 보면 어색한 건/ 서로 무덤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눈 속에 관이 안치된 현실이 있지요/ (…) / 입구가 막힌 뒤에도/ 나무뿌리 무성한 팔로 서로를 안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반쯤 죽었어요.’
코로나19의 그늘을 낚아챈 구절이건만 엊그제 참극이 떠오른다. 모든 건 서로 엮인 법. 젊은이들의 영혼이 중음신(中陰身)으로 떠도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국익 외교 못지않게 윤 대통령이 매조질 일이다. 이 시대 봉황을 날게 하라. 그들이 두 번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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