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들은 왜 빗창과 낫을 휘두르며 시위에 나섰나
[황의봉 기자]
▲ 제주해녀항일운동 90주년 특별전 해녀박물관에서 2022년 8월17일부터 12월18일까지 열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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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와 항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가 합쳐진 '해녀항쟁'은 제주도의 자랑스런 역사이자, 오늘날에도 제주해녀의 강인함을 대변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꼽힌다. 연인원 1만7천여 명이 238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에 참여, 제주도뿐 아니라 일제하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항일투쟁사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앞장선 항일투쟁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연 독보적 지위를 차지한다.
제주 해녀항쟁은 올해 9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제주에서 그것도 관심을 갖는 일부에서나 그 치열했던 투쟁사와 주역들을 기리고 있을 뿐 전국적으로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채 90주년을 넘기는 듯하다.
다행히도 제주 4·3연구소와 4·3평화재단에서 '해녀 항쟁에서 4·3을 보다'란 시민강좌를 열었다. 연구자들로부터 강의를 듣고 12일 마지막으로 관련 현장을 답사했다. 1931년 12월 1차 투쟁이 비바람 몰아치는 악천후로 무산된 것을 회상시키려는 듯 답사팀은 수시로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빗속에서 현장을 찾아다녀야 했다.
답사팀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해녀박물관, 그리고 해녀항일운동기념탑과 해녀노래비 등 기념물이 세워진 연두망 동산이다. 해녀박물관에서는 마침 제주해녀항일운동 90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당시 해녀들의 실태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각종 통계자료와 도구들이 전시돼 해녀투쟁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제주를 방문하는 분들에게 관람을 강추한다.
▲ 빗창과 호미 해녀들의 물질도구로 해녀시위 현장에 들고 나왔다. 왼쪽이 빗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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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망 동산은 제주에서도 해녀 숫자가 가장 많았던 구좌면 세화리 하도리 상도리 해녀들이 집결하기에 편리한 중간지역으로 시위가 벌어졌던 세화오일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동차도로가 바로 옆으로 나 있고, 동산에서 동쪽으로 내려간 지점은 4·3 당시 구좌면 주민 74명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기도 하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오일장을 택해 하도리 해녀 300여 명이 2차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호미(제주에서는 낫을 호미라 한다. 미역 모자반 감태 등을 떼어내는 도구)와 빗창(바위에 붙은 전복을 떼어내는 도구로 납작한 쇠붙이에 고무줄을 달아 손에 쥔다)을 들고, 어깨에는 양식 보따리를 메고 세화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인근 마을에서 모여든 해녀들과 합세, 집회를 열고 해녀조합에 대한 성토를 한 뒤 제주읍을 향해 행진에 나섰다. 시위행렬이 구좌면사무소에 다다르자 면장이 나서서 요구조건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고, 오후 5시경 일단 해산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구좌·성산의 해녀들이 각 마을별로 회의를 여는 등 해녀조합에 대한 반발 분위기가 확산해갔다. 마침 다음 장날인 1월 12일 새로 부임한 도사(島司·도지사) 겸 해녀조합장인 다구치(田口禎熹)가 순시차 구좌면을 통과할 것이라는 소식들 듣고 구좌면 하도·세화·종달·연평리, 정의면(현 성산읍) 오조·시흥리 등의 해녀들이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12일 장날이 되자 3차 시위가 벌어졌다. 세화 경찰관주재소 동쪽 네거리에 종달·오조리 해녀 300여 명과 하도리 해녀 300여 명, 세화리 해녀 40여 명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시위대는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고 만세를 외치면서 세화장으로 향했다. 이날 낮기온은 섭씨 7.9도였으나 바람이 초속 8미터가 넘어 매서운 겨울날씨였다.
시위대는 세화장에 모여든 군중들과 더불어 집회를 열고,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투쟁 의지를 다지는 연설을 차례로 했다. 이때 마침 제주도사를 태운 자동차가 시위대 뒤로 달려오다가 놀라서 순시를 포기하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집회를 중단하고 차를 에워쌌다.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도사는 해녀들과의 대화에 응하기로 했다. 해녀대표 3인이 경찰관주재소에서 도사와 마주앉아 '지정판매 반대', '해녀조합비 면제',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 항일적 성격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직접 담판을 벌였다. 결국 도사는 해녀들의 시위에 굴복하여 요구조건을 5일 내 해결하겠다고 약속, 사태를 무마할 수 있었다.
도사와의 합의 이후에도 아무 소식이 없고 오히려 해녀들과 청년들 체포에 나서자 해녀들은 1월 24일 4차투쟁에 나섰다. 역시 세화 오일장날이었고 400∼500명이 모였다. 팔과 팔을 서로 끼고 4열 종대를 지어 나아갔다. 경찰은 하늘로 총을 쏘면서 해산을 시도했다. 이때 경찰은 해녀들이 입은 흰저고리에 붉은 도장을 찍어 표시를 한 뒤 해녀들이 흩어지자 이를 근거로 곳곳에서 연행에 나섰다. 마지막 대규모 시위였다.
일본어민 진출로 생존권 위협받게 된 해녀들
이 무렵 전남 목포에서 무장경찰 40여 명이 급파되기도 했다. 26일에는 우도 해녀들이 주동자를 검거하러 온 배를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고, 27일에는 종달리 해녀들이 검거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이 출동하여 진압, 해산됨으로써 해녀들의 저항은 진정되었다(해녀투쟁 과정은 박찬식 박사의 강의내용 인용).
<조선일보>(1932.1.24)는 "제주읍 동문 외에는 경관을 배치해 통행인 주소, 성명을 조사하므로 일반은 통행의 위험을 느끼고 있다. 경계는 전 제주도적으로 삼엄하여 마치 계엄령이 내린 듯하다"고 살벌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해녀들이 이같은 투쟁을 벌이게 된 데에는 그들의 비참한 실태와 함께 해녀조합의 어용화로 인한 각종 수탈적 행위가 만연한 데 따른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1876년 개항으로 제주 해녀들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시대의 출륙금지에서 벗어나 타지역으로 나갈 수 있게 된 반면, 일본어민의 진출로 제주 어장이 황폐화함에 따라 채취량이 감소해 생존권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이에 제주 해녀들은 살 길을 찾아 한반도 남부와 북부는 물론, 일본과 중국의 다렌(大連) 칭다오(靑島) 나아가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했다. 1930년대는 그 수가 400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다. 해녀들이 가장 선호한 지역은 한반도 남해안 지역. 값비싼 해조류가 풍부했다. 1916년 일본으로 수출한 우뭇가사리 가격은 미역의 66배, 1930년대에는 1033배에 달했다고 한다(박찬식 박사).
▲ 당시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이 주요기사로 다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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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 해녀조합이다. 해녀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접한 조천면장 김태호 등 제주도 유지들이 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을 창립했다. 해녀조합은 해녀가 생산한 물건을 공동판매, 중개도 해주고, 자금을 융통해주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8000명이 넘은 제주도 해녀들이 너도나도 조합에 가입했다. 조합 역시 해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키워주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해녀조합은 태생부터 결정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조합장을 일본인 제주도사가 겸했다는 점이다.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본인 조합장이 해조회사와 일본인 상인에게 유리하게 운영하면서 어용화돼 갔다.
해녀조합은 소수의 일본인 상인이나 조선인 중간상인과 결탁, 생산자의 자유판매를 금지하고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정가격을 매겨서 수탈했다. 해녀들이 시위를 하면서 지정판매 반대를 맨 앞에 내세운 이유다.
당시 가장 비싸게 팔렸던 전복이나 우뭇가사리 등 해조류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조회사에 판매해 수익의 절반을 이 회사에 수수료로, 또 5분의 1 정도를 해녀조합 수수료로 지불해야 했다. 여기에 해녀조합비와 거래상인 인건비 등을 빼고 나면 해녀의 실제 수입은 5분의 1 정도 밖에 안 됐다. 게다가 해조류 가격도 시가의 반 정도로 지정해버려 해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지정가격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해녀들은 다구치 도사에게 지정판매 반대 이외에도 ▲일체의 계약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 ▲미성년과 40세 이상 해녀 조합비 면제 ▲병, 기타로 인하여 입어하지 못한 자에게 조합비 면제 ▲상인 옹호한 마쓰다(升田) 서기를 즉시 면직 등 8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는데, 후일 이중 상당수가 받아들여졌다.
당시 해녀시위는 제주도 전역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고, 신문에서도 크게 보도해 전국적으로도 알려졌다. 일제 당국은 시위주동자를 검거, 고문을 가하며 배후를 추궁했다. 제주도 내의 항일운동세력을 파악해 검거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각 면에 비밀결사를 조직해 제주 전도 적화를 획책(동아일보 1933.2.8.) ▲비밀결사 혁우동맹을 조직, 당기본대중을 획득(조선일보 1933.2.8.) 등 신문보도에서도 이같은 기류가 읽힌다.
▲ 해녀투쟁 주역 3인의 흉상 왼쪽부터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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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투쟁의 주역으로 꼽히는 3인이 있으니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이다. 모두가 하도리 출신으로 일본인 도사와 담판을 벌인 핵심인물이다. 이들은 해녀투쟁 이후 경찰에 체포돼 미결수로 6개월간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 안타깝게도 부덕량은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끝에 폐병으로 1939년 10월4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옥련 부춘화 두 해녀를 생전에 인터뷰한 허호준 박사(한겨레 선임기자)에 의하면 이들 주동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은 말도 못하게 당했지요. 네모난 도장을 손가락 사이에 놓고 누르면 손가락에 홈이 파져버려요. 귀밑 급소를 누르면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옷을 벗겨서 쇠좆매(채찍의 일종)로 등을 때리고, 장작 위에 무릎을 꿇리고 허벅지에 올라타서 밟아요. 그러면 몸이 망가져요."(김옥련의 생전 증언)
연두망 동산에는 해녀항쟁을 주도한 이들 3인의 흉상이 세워졌고, 2000년대에 들어와 정부에서 건국포장을 추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됐다.
해녀투쟁이 조직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질 수 있었던 데는 사실 배후가 있었다. 바로 야학강습소였다.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의 야학교사들이 해녀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요즘 용어로 의식화 교육을 했던 것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마을에 야간학습소가 생기자 나는 저녁을 이용하여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망치다시피 하여 야학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그것이 2년간 계속된다. 나는 이 야학에 다님으로써 나의 남편과 만나게 되고 해녀사건을 주동하게 되는 인연과 맺어지게 된다. 이 야학소는 일본식민시기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의식있는 젊은 남성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교육을 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준 계기가 됐다."(김옥련 증언)
해녀항쟁의 배후로 지목된 청년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일제는 해녀들과 투쟁방식 등을 논의했던 야학교사와 청년 등을 상대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들어가 오문규, 김순종, 강관순 등 40여 명을 검거했다. 또 그 배후에 사회주의자들이 개입돼 있다며 당시 제주지역 항일운동 주도세력 검거에 집중했다. 심지어 제주출신들이 많이 살던 일본 오사카에서도 해녀항쟁을 지원하기 위해 제주도로 가려던 김인태 등 48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 세화오일장 터 지금은 평범한 주택가로 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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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학강습소 터 하도보통학교(지금의 하도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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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항쟁은 참여한 인원수와 지속기간, 체포자 숫자, 그리고 전국에 던진 충격 등으로 볼 때 제주공동체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해녀투쟁은 해방 후 4·3이 발발하자 군경과 서청 등 외부세력에 저항하면서 다시 역사적 기억으로 소환되었고,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는 제주인의 정신적 바탕을 형성하고 있다.
빗속에서 진행된 현장답사는 연두망 동산을 지나 세화오일장 터와 세화 경찰관주재소 터 그리고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터를 거쳤다. 오일장 터는 주택가로 변했고, 해녀대표와 일본인 제주도사가 담판을 벌였던 주재소는 파출소로 간판을 바꿔 달고 있었다. 야학강습소 자리엔 표지석이 설치돼 있었다.
▲ 애국지사 부덕량의 묘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애국지사 부덕량'을 기리는 답사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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