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휠체어가 싫다고 하셨어, 하지만 [이제 겨우 절반 살았을 뿐입니다]

이정혁 2022. 11. 1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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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뮬리 보러 떠난 고창 나들이... 엄마, 살아있는 동안 추앙하며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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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혁 기자]

가을은 나들이의 계절이다. 코발트 빛 하늘은 어떤 배경을 품어도 예술이 된다. 황금벌판을 이루는 누런 벼들의 자태, 한 해를 충만히 살아낸 단풍의 기품은 시선을 강탈하다 못해 눈을 멀게 한다. 길었던 코로나의 겨울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찾아온 가을은 더욱 그러하다. 베란다 창문 안까지 침범한 가을이 등을 떠민다.

추세에 민감한 세 동거인도 떠날 채비를 한다. 가을 단풍을 제대로 즐기려면 하다못해 뒷산에라도 올라야 한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놀이터 단풍도 제법 쓸만하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다. 단풍의 숲길 한가운데서, 색의 공간에 압도되는 순간의 기쁨을 느껴야만 하는데… 엄마는 그럴 수 없다. 엄마는 오래 걷지 못한다.

불 붙은 휠체어 구입 논쟁
 
▲ 고창 핑크뮬리 축제 10월 한달간 전라북도 민간정원 '꽃객프로젝트'에서 진행 중인 필크뮬리 축제.
ⓒ 이정혁
최대한 평지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낄 만한 곳을 검색하다가 찾아낸 것이 핑크뮬리다. 우리말로는 '털 쥐꼬리새', '분홍쥐꼬리새'라고 불리는 벼과의 풀이다. 예쁜 이름과는 달리, 가공할 만한 위력의 번식력과 생존력을 지녔다. 환경부에서 2019년 생태계 위해성 2급 외래식물로 지정한 이유다. 영양가 없이 때깔만 좋은 풀때기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창 핑크뮬리 축제로 떠나기 이틀 전, 논쟁이 붙었다. 엄마의 휠체어 구매 여부를 놓고 언성이 높아졌다. 휠체어를 사자. 싫다. 그럼, 빌리자. 그것도 싫다. 사지 멀쩡한데 무슨 휠체어냐. 꼭 장애가 있어서 타는 게 아니다, 교통사고 환자나 신체 허약자들도 이용하는 보조기구다. 아직 휠체어 탈 정도는 아니라면서 엄마의 감정이 격해졌다.

엄마의 마음이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만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짐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 스스로 허락할 수 없는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는 없다. 이번 한 번만 걸어보고 힘들면 바로 사는 거다. 좀 걸어보고 안 되면 교대로 업고 다니자. 적정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나들이 당일의 하늘은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내가 진짜 가을 하늘이지. 이런 날 안 떠나고 배기겠어? 민들레 홀씨 크기의 구름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었다. 하늘이 당기는 기운 탓인지, 발걸음은 중력을 거스른다. 차창 밖으로 마시멜로를 닮은 볏짚 묶음이 수백 개쯤 지나갔을 무렵, 드디어 고창에 도착했다.
 
▲ 꽃객프로젝트 고창 픙크뮬리 축제가 열리는 꽃길 프로젝트
ⓒ 이정혁
 
핑크뮬리 축제의 장소는 '꽃객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전라북도 공인 민간정원 1호다. 축제장 한 편에 마련된 주차장에서부터 탁 트인 핑크뮬리밭이 보인다.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의 발걸음도 한산하다. 백수의 장점 중 하나가 평일 활용이다. 어딜 가도 사람에 치이지 않고 여유 있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성인 입장료 5천 원씩을 내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비싸다고 하기에는 풍경이 그럴싸하지만, 그렇다고 싸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본전 생각나는 건 아닌데, 계속 신경 쓰이는, 생각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가격이다. 내년부터는 입장 후에 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이 되길 바란다.

솜사탕보다 푹신하고, 극세사 이불만큼 보들보들해 보이는 핑크뮬리지만, 가까이서 만져보면 까슬까슬하다. 벼과의 식물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핑크뮬리 인기의 비결은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잔잔한 배경이 되어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봉사 정신이 아닐까 싶다. 위해성 2급이면 그 정도 밥값은 해야지.

사진 촬영을 위해 핑크뮬리밭 가운데로 이동한다. 포즈를 취하다 내뱉는 엄마의 말 한 마디가 격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멀리서 볼 때는 이쁘더만, 가까이서 보니께 꼭 인순이 머리카락 같구먼."

엄마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대가수 인순이 님께 실례가 될 수 있겠다. 저희 엄마가 연세가 조금 더 많으시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실 거라 믿는다. 개인적으로 '밤이면 밤마다' 적부터 팬임을 고백한다(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다리 아픈 티를 안 내려는 엄마
 
▲ 엄마와 핑크뮬리 핑크뮬리의 꽃말은 고백이다. 엄마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고백한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 이정혁
남는 건 사진이다. 입장료를 떠올리며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사진 촬영에 임했다. 엄마한테 점핑샷 찍어달라고 부탁해서 재롱 아닌 재롱도 피웠다. 그렇게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나서 엄마는 한 편에 설치된 그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치 빠른 자식들은 다리 아픈 티를 안 내려는 엄마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차렸으나, 그네 위의 엄마가 너무 해맑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동심으로 돌아가서 그네를 타는 엄마의 뒤편으로 푸른 소나무와 그보다 더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핑크뮬리의 꽃말은 '고백'이다. 그간 멀리 떨어져 사느라 고백하지 못했던 몇 마디 단어가 떠오른다. 엄마 덕분에 이렇게 잘 살 수 있어서, 엄마의 희생 때문에 이만큼 행복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가을빛은 사람의 눈시울을 촉촉하게 만드는 나쁜 재주가 있다.
 
▲ 고창 풍천장어 두께가 삼치만 한 민물장어. 고창까지 가서 풍천장어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 이정혁
 
고창까지 가서 장어를 먹지 않는다는 건, 예비군 훈련 가서 총을 쏘지 않고 오는 기분일 게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가성비 좋은 장어집으로 향했다. 젊은 부부가 하는 장어집인데, 장어의 두께가 살 오른 고등어나 삼치 수준이다. 엄마는 몇 점 집어 들고나서 장어탕에 밥을 말았다. 짜장면이 싫다고 하시던 엄마라 불리는 엄마. 나중에 손주들 데려와서 꼭 한 번 사줘야겠다는 포부를 품는 천생 엄마….

오후 일정으로 예정했던 메밀꽃밭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엄마를 추궁했다. 아니, 협박했다. 휠체어 안 사면 이제 밖에 안 나갈 거야. 엄마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제야 휠체어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자식들의 승리다. 장대 같은 자식 둘이 있는데 뭘 걱정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의 표정은 패배자의 얼굴이 아니다.

이제 휠체어를 사서 전국 어디든 떠날 것이다. 엄마, 살아있는 동안 추앙하며 살게. 세 동거인의 행동반경과 무대가 거침없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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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고창 핑크뮬리 축제는 10월 31일 자로 행사종료 되었습니다. 주 1회 연재라서 공간과 시간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기사는 발행 후 수정 보완을 거쳐 개인 블로그인 https://blog.naver.com/irondownbros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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