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휠체어가 싫다고 하셨어, 하지만 [이제 겨우 절반 살았을 뿐입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정혁 기자]
가을은 나들이의 계절이다. 코발트 빛 하늘은 어떤 배경을 품어도 예술이 된다. 황금벌판을 이루는 누런 벼들의 자태, 한 해를 충만히 살아낸 단풍의 기품은 시선을 강탈하다 못해 눈을 멀게 한다. 길었던 코로나의 겨울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찾아온 가을은 더욱 그러하다. 베란다 창문 안까지 침범한 가을이 등을 떠민다.
추세에 민감한 세 동거인도 떠날 채비를 한다. 가을 단풍을 제대로 즐기려면 하다못해 뒷산에라도 올라야 한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놀이터 단풍도 제법 쓸만하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다. 단풍의 숲길 한가운데서, 색의 공간에 압도되는 순간의 기쁨을 느껴야만 하는데… 엄마는 그럴 수 없다. 엄마는 오래 걷지 못한다.
▲ 고창 핑크뮬리 축제 10월 한달간 전라북도 민간정원 '꽃객프로젝트'에서 진행 중인 필크뮬리 축제. |
ⓒ 이정혁 |
고창 핑크뮬리 축제로 떠나기 이틀 전, 논쟁이 붙었다. 엄마의 휠체어 구매 여부를 놓고 언성이 높아졌다. 휠체어를 사자. 싫다. 그럼, 빌리자. 그것도 싫다. 사지 멀쩡한데 무슨 휠체어냐. 꼭 장애가 있어서 타는 게 아니다, 교통사고 환자나 신체 허약자들도 이용하는 보조기구다. 아직 휠체어 탈 정도는 아니라면서 엄마의 감정이 격해졌다.
엄마의 마음이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만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짐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 스스로 허락할 수 없는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는 없다. 이번 한 번만 걸어보고 힘들면 바로 사는 거다. 좀 걸어보고 안 되면 교대로 업고 다니자. 적정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 꽃객프로젝트 고창 픙크뮬리 축제가 열리는 꽃길 프로젝트 |
ⓒ 이정혁 |
핑크뮬리 축제의 장소는 '꽃객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전라북도 공인 민간정원 1호다. 축제장 한 편에 마련된 주차장에서부터 탁 트인 핑크뮬리밭이 보인다.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의 발걸음도 한산하다. 백수의 장점 중 하나가 평일 활용이다. 어딜 가도 사람에 치이지 않고 여유 있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성인 입장료 5천 원씩을 내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비싸다고 하기에는 풍경이 그럴싸하지만, 그렇다고 싸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본전 생각나는 건 아닌데, 계속 신경 쓰이는, 생각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가격이다. 내년부터는 입장 후에 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이 되길 바란다.
솜사탕보다 푹신하고, 극세사 이불만큼 보들보들해 보이는 핑크뮬리지만, 가까이서 만져보면 까슬까슬하다. 벼과의 식물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다. 핑크뮬리 인기의 비결은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잔잔한 배경이 되어 인물을 돋보이게 하는 봉사 정신이 아닐까 싶다. 위해성 2급이면 그 정도 밥값은 해야지.
사진 촬영을 위해 핑크뮬리밭 가운데로 이동한다. 포즈를 취하다 내뱉는 엄마의 말 한 마디가 격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멀리서 볼 때는 이쁘더만, 가까이서 보니께 꼭 인순이 머리카락 같구먼."
엄마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다 보니, 대가수 인순이 님께 실례가 될 수 있겠다. 저희 엄마가 연세가 조금 더 많으시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실 거라 믿는다. 개인적으로 '밤이면 밤마다' 적부터 팬임을 고백한다(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 엄마와 핑크뮬리 핑크뮬리의 꽃말은 고백이다. 엄마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고백한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
ⓒ 이정혁 |
▲ 고창 풍천장어 두께가 삼치만 한 민물장어. 고창까지 가서 풍천장어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
ⓒ 이정혁 |
고창까지 가서 장어를 먹지 않는다는 건, 예비군 훈련 가서 총을 쏘지 않고 오는 기분일 게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가성비 좋은 장어집으로 향했다. 젊은 부부가 하는 장어집인데, 장어의 두께가 살 오른 고등어나 삼치 수준이다. 엄마는 몇 점 집어 들고나서 장어탕에 밥을 말았다. 짜장면이 싫다고 하시던 엄마라 불리는 엄마. 나중에 손주들 데려와서 꼭 한 번 사줘야겠다는 포부를 품는 천생 엄마….
오후 일정으로 예정했던 메밀꽃밭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엄마를 추궁했다. 아니, 협박했다. 휠체어 안 사면 이제 밖에 안 나갈 거야. 엄마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제야 휠체어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자식들의 승리다. 장대 같은 자식 둘이 있는데 뭘 걱정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의 표정은 패배자의 얼굴이 아니다.
이제 휠체어를 사서 전국 어디든 떠날 것이다. 엄마, 살아있는 동안 추앙하며 살게. 세 동거인의 행동반경과 무대가 거침없이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고창 핑크뮬리 축제는 10월 31일 자로 행사종료 되었습니다. 주 1회 연재라서 공간과 시간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기사는 발행 후 수정 보완을 거쳐 개인 블로그인 https://blog.naver.com/irondownbros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독립투사의 사직 권고를 받은 친일파
- 한국형 인태전략 자화자찬... 윤석열 정부 이건 몰랐나
- 불타버린 절터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여길 보세요
- 느린 사람의 운동, 이렇게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 대구에서 찹쌀수제비 주문하신 분, 놀라지 마세요
- '순방' 동행 김건희 여사, 캄보디아 심장질환 아동 위로 방문
- '세상을 구하는 비즈니스'가 정말로 생겨나는 중이다
- '한미일 정상회담' 개최... 윤 대통령 "북한 핵 도발 공조 강화해야"
- 미 민주당, 네바다 승리로 50석 확보... 상원 다수당 확정
- 이상민의 "폼 나는 사표" 발언에, 박지원 "입 다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