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깊은 시골에 이성계 칼과 김삿갓 지팡이가 있는 이유
[이돈삼 기자]
▲ 곡성 공북마을의 감수확 풍경. 감을 따는 농군의 얼굴에서 풍성함이 묻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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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나뭇잎은 울긋불긋 단풍 들게 하고, 국화는 형형색색으로 꽃을 피웠다. 산과 들이 온통 가을빛으로 가득하다. 지난 1일, 차를 타고 강변을 드라이브를 했다. 즐거움이 배가 된다.
산자락의 밭에서 감을 따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감나무에 감도 주렁주렁 걸렸다.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다.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정겹다. 빨갛게 물드는 감잎도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감이 많이 달렸습니다. 때깔 좋고, 튼실해 보이는데요."
"예, 올해 풍년입니다. 맛도 좋아요. 하나 드셔 보셔요. 약 안 했으니, 그냥 드셔도 돼요."
감을 따던 농군이 길손의 말을 받아준다. 염치 생각하지 않고, 단감 하나를 덥석 베어 물었다. 입안으로 만추가 전해진다. 맛있고, 달다. 감이 '종합비타민제'라는 말을 실감한다.
▲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는 대봉감. 크고 튼실하게 익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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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북마을의 감 따는 풍경. 감을 따는 농군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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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깨가 쏟아진다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공북마을이다. 주변에 산이 지천이다. 당연히 밤과 낮의 기온차가 크다. 감을 재배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지녔다. 큰 일교차와 양질의 사양토는 깻잎 재배에도 맞춤이다.
깻잎의 향이 좋고, 두껍다. 저장성이 좋다. 빛깔도 선명해 귀한 대접을 받는다. 깻잎을 따려면 일손이 많이 들어가지만, 노인들도 큰 부담없이 할 수 있다. 깻잎 농사를 많이 짓는 이유다.
▲ 깻잎을 재배하는 하우스. 마을주민들에게 높은 소득을 가져다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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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리를 맞은 노지의 들깨. 산중의 '상고대'라도 연출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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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죽장도장 전수관도 마을의 자랑이다. 낙죽장도(烙竹粧刀)는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에 문양이나 글을 새긴 호신용 또는 장신구용 칼을 가리킨다. 글은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을 새긴다. 전수관은 국가무형문화재 낙죽장도장 보유자 한상봉씨의 작업장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한상봉은 아버지(한병문)의 가업을 잇고 있다.
전수관에는 장생검, 단장검, 단장도 등 크고작은 낙죽장도가 전시돼 있다. 한상봉이 복원한 사인검(四寅劍)도 있다. 호랑이 네 마리가 그려진 사인검은 태조 이성계의 칼이다. 삿된 것을 물리치고, 하늘의 양기로 세상을 바르게 한다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 낙죽장도. 공북마을에 있는 낙죽장도장 전수관에 크고 작은 낙죽장도 작품이 전시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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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죽장도의 재료로 쓸 대나무. 3년 이상 자란 대나무를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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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죽장도는 칼 못지않게 칼집이 중요하다. 3년 이상 자란 대나무(분죽)를 쓴다. 불에 달군 인두로 대나무에 새기는 작업은 숨조차 멈춰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작품을 망친다. 정교한 작업이다. 하나의 장도를 만드는 데는 2개월에서 6개월이 걸린다.
▲ 한상봉씨가 대나무에 낙죽으로 새긴 글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가 갖춰야 할 철학과 덕목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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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죽장도에 대해 설명하는 한상봉씨. 한씨는 국가무형문화재 낙죽장도장 보유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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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만족하는 소박한 사람들의 마을
보성강변에 자리한 공북(拱北)마을은 지형이 거북을 닮았다고 한다. 마을 앞 연못에 살던 거북이 용으로 변해 하늘로 올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연못은 '여정자들'에 있었다. 여정자들은 여씨가 심은 정자나무가 있던 들을 가리킨다. 연못은 지금 메워졌고, 그 자리에 집이 들어섰다. '샛터'로 불린다. 샛터는 풍수지리로 볼 때 금귀몰니(金龜沒泥)의 형국이다. 황금거북이가 알을 품은 땅이라고 한다.
공북마을은 1구 구룡(龜龍), 2구 효대(孝垈)로 이뤄져 있다. 구룡은 마을 앞 연못에서 거북이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고 이름 붙었다. 효대는 효자가 대를 이어 나왔다는 곳이다.
지명 유래와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효자는 해마다 한양으로 올라가 임금을 뵙고 문안을 여쭸다. 그의 마음을 높게 산 임금이 '마을에서 북쪽을 향해 절하는 것으로 대신하라'고 했다. 그날 이후 효자는 북쪽에 있는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것으로 대체했단다.
▲ 곡성 공북리 2구 효대마을 풍경. 노거수와 어우러져 멋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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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북리 1구 구룡마을 풍경. 한 어르신이 사륜구동차를 타고 밭으로 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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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 강변에 공북나루도 있었다. 작은 배가 연결해 준 강 건너에는 조선시대 능파정(凌波亭)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며 들렀던 곳이다. 능파정은 이순신의 오랜 친구인 신대년이 지은 집이다. 신대년은 장절공 신숭겸의 후손이다.
▲ 공북마을에서 가까운 능파정 자리.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며 들렀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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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나루는 배가 머무는 나루라고 '박의정지(舶艤亭池)'로 불렸다. 1971년 마을과 석곡을 잇는 목사동2교가 놓이면서 나루가 없어졌다. 지금의 목사동2교는 1999년에 새로 가설했다.
"옛날에 여기가 학교 자리여. 지금은 경지정리가 다 됐는디. 그 전에 학교가 있었어. 교회도 있었고. 그래서 '학교밭'이라 불렀어."
길에서 만난 한 어르신의 말이다. 어르신이 얘기한 학교밭은 사립 월미학교를 가리킨다. 현재 석곡초등학교의 전신이다. 학교와 교회는 모두 강 건너 석곡면소재지로 옮겨갔다.
'그리워라 그리워라 아마득한 그 시절이 …(중간생략)… 쿵덩거리던 방앗간 하얀 물안개 내뿜던 물레방아/ 노을 강빛 속 알록달록 갈피리/ 뱃사공 집 비우는 날이면 강건너 멈춘 배/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었네/ 학교갔다 오는길 고무신에 빠가사리 다슬기 잡고/ 은빛모래 사장에서 씨름하던/ 어린 추억이 숨쉬는 곳 내고향 박의정지' 마을 표지석에 새겨진 글의 일부분이다.
▲ 보성강 풍경. 공북마을을 품은 곡성군 목사동면과 석곡면의 경계를 짓고 있다. 지난 3월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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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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