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행복할까?…'극한직업'화 되는 드라마 속 재벌 [박영국의 디스]

박영국 2022. 11. 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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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즘은 드라마 속 재벌도 만만치 않은 직업으로 그려진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2018년), 사내맞선(2022년) 속 재벌은 어릴 적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고된 경영수업을 거친다.

상속받은 재산의 상당수를 세금으로 떼여야 하는 형편인지라 경영권 승계 과정도 순탄치 않다.

과거 드라마 속 재벌들처럼 사치를 누리거나 유흥을 즐길 시간도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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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처럼 살다 회사 물려받는 과거 재벌 캐릭터…반기업 정서 불러와
최근 재벌 캐릭터는 고된 경영수업에 치열한 상속경쟁…'극한 직업'
막중한 책임 짊어진 현실 속 재벌, 돈 쓸 시간이나 있을까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백화점 재벌 2세 강풍호 역으로 나온 배우 차인표가 클럽에서 색소폰을 불다 백화점 직원 이진주(신애라 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장면.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 갭처.


#대기업 오너의 아들인 주인공은 외국을 돌며 한량처럼 살다 부친이 사망하자 귀국한다. 회사는 이미 부친의 창업 동료와 그 아들에게 장악된 상태지만, 주인공은 뜬금없이(?) 뛰어난 기지를 발휘해 회사를 되찾는다.


1994년에 방영된 인기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주인공 차인표의 버터향 가득한 러브신과 천호진의 매운맛 악역이 기억에 남는다. 원래는 재벌과 서민의 사랑, 이른바 ‘신데렐라 신드롬’의 전형을 보여주는 드라마지만, 로맨스 코드를 제거하고 건조하게 줄거리만 뽑으면 딱 이런 내용이다.


국민 상당수가 주식 투자 경험이 있고, 기업 경영상황에 관심이 큰 요즘 시대에는 박수가 아닌 비난을 받을 일이다. 내가 투자한 회사가 한량처럼 지내다 오직 오너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영권을 장악한 자(차인표)에 좌지우지되는 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차라리 창업멤버(아마도 2대주주)의 아들이자 오랜 기간 회사에 몸담으며 착실하게 경영수업을 쌓아온 드라마 속 반동인물(천호진)이 적절한 후계자라는 판단이 들 것이다.


과거 드라마 속 재벌은 이처럼 능력과 무관하게 혈통에 근거해 모든 것을 누리고, 당연하다는 듯 경영권을 물려받는 존재로 그려졌다.


상식을 벗어나는 사치와 일반 서민들을 고려하지 않은 민폐 장면도 당연하다는 듯 등장했다.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사주려고 영업 중인 백화점의 셔터를 내리고, 프로포즈를 위해 놀이공원을 통대관하는, 요즘 같으면 전국적인 논란을 넘어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드라마 속 재벌의 이미지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꽃보다 남자(2009년), 상속자들(2013년) 속 재벌 자녀들은 고교 시절부터 사치의 끝판왕을 보여주며 서민 여주인공 앞에서 한껏 부를 과시한다.


이렇게 그려진 재벌의 모습은 드라마 속에서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시청자들의 부러움을 자아냈을지 모르겠지만 현실에 대입하면 서민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아무 노력과 능력 없이 부모 잘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일반 서민들이 평생 모을 돈을 단숨에 써대고 아무 검증 없이 높은 자리에 오르니 눈꼴시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 기저에 깔린 반기업 정서의 일정 부분은 이런 드라마 속 재벌 이미지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SBS 드라마 '사내맞선'에서 재벌 2세이자 능력있는 경영자 강태무를 연기하는 배우 안효섭. ⓒSBS

하지만 요즘은 드라마 속 재벌도 만만치 않은 직업으로 그려진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2018년), 사내맞선(2022년) 속 재벌은 어릴 적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고된 경영수업을 거친다. 업무 능력도 뛰어나고 지독할 정도로 근면 성실하다. 드라마 전개상 어쩔 수 없이 여주인공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 외에는 철저하게 일에만 매달린다.


데이트 방식은 서민인 여주인공에 맞춘다. 맛집에서는 남들처럼 줄을 서서 먹고, 무한리필 집에서는 식도까지 꽉 찰 때까지 욱여넣어 본전을 뽑는다. ‘민폐 프로포즈’도 없다. 놀이공원을 통으로 빌려도 일반 관람객들이 다 돌아간 폐장 시간 이후에 빌린다.


오는 18일 첫 방송되는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재벌가 내의 암투가 그려진다. ‘재벌 총수 일가의 오너리스크를 관리하는 비서의 인생 리셋’이라는 설정을 제외하면 총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자식들 간 벌이는 치열한 다툼이 배경이다.


더 이상 재벌 이미지는 금수저 물고 태어나 아무 걱정 없이 펑펑 놀다 회사 물려받는 ‘상팔자’가 아니다. 오히려 ‘극한직업’에 가깝다.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대표 이미지. ⓒJTBC

현실도 비슷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굴지의 대기업 회장들의 삶은 결코 평온하고 안락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들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젊은 시절부터 경영자의 자질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했고, 선대 회장으로부터, 그리고 주주들과 회사 구성원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오랜 기간 경영능력 검증을 거쳤다. 상속받은 재산의 상당수를 세금으로 떼여야 하는 형편인지라 경영권 승계 과정도 순탄치 않다. 아직까지도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만들지 못해 골치를 썩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앞으로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굴지의 기업들을 지키기 위해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급변하는 산업 패러다임 속에서 잠시라도 지체했다가는 도태될 수 있다. 단 한 번의 전략적 판단이 기업의 퀀텀점프를 이끌 수도 있고 엄청난 손해를 불러올 수도 있는지라 막중한 책임감에 억눌린다.


과거 드라마 속 재벌들처럼 사치를 누리거나 유흥을 즐길 시간도 없어 보인다. 끊임없이 경영진과 머리를 맞대 사업 전략을 수정하고 사방에서 돌출하는 리스크에 대응해야 한다. 수시로 국내 사업 현장을 점검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탄탄히 하기 위해 해외 출장에도 나선다.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차인표처럼 색소폰이나 불고 놀러 다니다 대기업 총수가 되는 이는 요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은 고된 ‘극한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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