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수난사

임영열 2022. 11. 12. 11: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물유적] 개성에서 일본을 거쳐 서울로... 2005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

[임영열 기자]

 1348년 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 경천사에 세워졌던 10층 석탑(왼쪽). 일본에 반출되었다 다시 돌아와 1960년 경복궁에 세워진 석탑(가운데). 2005년 다시 해체 복원되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온 현재의 경천사 10층 석탑(오른쪽)
ⓒ 국립중앙박물관
 "오! 서프라이즈!(Oh! Surprise!)"

2022년 5월 21일 저녁.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환영 만찬 장소인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 동문으로 입장한 바이든 대통령은 박물관 천장을 찌를 듯 높이 치솟아 있는 무언가를 올려다보며 "오! 놀랍군요!..."라며 경탄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고려시대 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탑으로 국보 제86호로 지정된 '경천사지 10층 석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서양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균형감을 지닌 크고 화려한 석탑이 실내에 우뚝 서있는 모습에 감동한 것 같았다"라고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날 바이든 대통령은 '경천사지 10층 석탑' 외에도 국보 '황남대총 북분 금관'과 보물 '여주 출토 동종'(청녕4년 명 동종)을 둘러보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미 정상회담 만찬 장소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선정한 것과 관련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 않았나 싶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과 함께 해체 복원되어 다시 세워진 경천사 10층 석탑. 현재의 모습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전통과 이국적 양식이 섞여있는 10층 석탑
 

우리나라 박물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약 41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1908년 9월 종로의 창경궁에서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시련을 겪으며 남산, 덕수궁, 구 중앙청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 2005년 현재의 자리인 용산에 터를 잡았다.

박물관 로비에 들어서면 13.5m 높이의 크고 화려한 석탑이 박물관 3층 높이까지 치솟아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위용을 드러낸다. 실내에 서 있는 아파트 4층 높이의 탑을 상상해보라. 바이든 대통령뿐만 아니라 관람객 누구라도 그 크기와 화려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전시관을 이동할 때나 계단을 따라 층을 올라갈 때도 줄곧 발길을 멈추고 눈길을 주게 된다.

한국사 검정능력 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석탑은 고려시대 때 대리석을 깎아 만든 '다각 다층 석탑'으로 1348년 3월 고려 충목왕 4년에 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의 개풍군 부소산 기슭 '경천사(敬天寺)'에서 만들어졌다. 1층 탑신석 상단에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지정팔년무자3월(至正八年戊子三月日)'이라는 명문이 남아 있다.
  
 1348년 3월 고려 충목왕 4년에 세워진 경천사지 10층 석탑
ⓒ 국립중앙박물관
 
지정(至正)은 원나라 순종 때 사용했던 연호로 지정 8년은 1348년이다. 탑의 형태를 보면 3단으로 된 기단은 위에서 볼 때 한자 '아(亞)' 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탑의 재료가 대부분 화강암인데 반해 특이하게 대리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원나라 양식을 그대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10층 탑신(塔身) 중 3층까지는 기단과 동일한 '아(亞)'자 일명 '사면 돌출형' 모양이다. 기단부에는 밑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과 나한들을 새겨 놓았다.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들의 법회 모습을 16장면으로 묘사한 화려한 조각들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형식은 원나라 때 유행한 라마교 양식이다. 3층은 지붕을 두 겹으로 구성하여 변화를 주었다.
   
 석탑의 기단부. 위에서 볼 때 한자 ‘亞’ 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원나라 양식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반면 4층부터 10층까지는 정사각형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몸돌에 난간을 세우고 옆모양이 여덟 팔(八) 자 형태의 '팔작지붕' 모양이다. 옥개석의 낙수면에 기와골을 섬세하게 모각하여 고려시대 목조 건물을 연상케 하는 우리 전통 양식을 취하고 있다.

몸돌 4면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오존 불상을 생생하게 조각했다. 이는 불교 존상들의 모습을 위계에 따라 표현한 것이다. 각 모서리마다 둥근기둥을 모각했다. 탑의 꼭대기 상륜부에는 네모난 보탑과 보주가 있다.

하늘을 향해 날렵하고 세련되게 솟아오른 탑신. 층층이 새겨진 다양하고 디테일한 조각들.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 석탑의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할 만하다.
  
 탑신에 새겨진 오존 불상
ⓒ 국립중앙박물관
   
 탑신부
ⓒ 국립중앙박물관
 
경천사 석탑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 건립에 큰 영향을 준다. 두 탑은 마치 쌍둥이라 할 만큼 매우 유사하다.

원나라 황제와 황후·황태자를 위하여

그렇다면 고려에서는 왜 우리나라에서 잘 나지도 않는 대리석을 사용하여 이국적인 원나라 양식과 우리 전통양식을 혼합하여 이 탑을 세우게 되었을까. 고려말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서기 1259년. 7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끈질긴 침략 전쟁에 항복한 고려는 결국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이후 80여 년 동안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으며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야 했다. 백성들은 원나라 침략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제공하느라 허리가 휘었다. 수시로 원나라 황실에서 요구한 '공녀'와 '환관'들을 바쳐야 했다.
  
 탑신부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조정에서는 '과부처녀추고별감'을 만들어 과부와 처녀들을 모집했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찍 결혼시키는 '조혼'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백성들의 반원(反元) 감정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이런 와중에 누가 왜 그토록 원성이 자자한 원나라 양식의 탑을 쌓았을까.
1층 탑신석에 새겨진 발원문에 답이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이 석탑의 발원자는 당시 원나라와 가까운 '친원파(親元派)' 세력으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진녕부원군 강융(姜融)과 자정원사(資政院使) 고룡봉(高龍鳳), 대화주 성공(省空), 시주 법산인 육이(六怡) 등의 시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원(元)나라 황제와 황후·황태자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며 이 탑을 세웠다.
   
 탑신 상부와 상륜부
ⓒ 국립중앙박물관
     
강융은 관노 집안 출신으로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신임을 얻었고 그의 딸을 원나라 정승에게 바쳐 권세를 누린 인물이다. 고룡봉 또한 고려 출신 환관으로 원나라에 '공녀(貢女)'로 간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이다.
  
공녀로 끌려가 고룡봉의 추천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의 여인. 드라마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는 '기황후(奇皇后)'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기황후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고 그 아들은 훗날 북원의 황제가 된다.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가 황후가 된 고려의 여인. 드라마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는 ‘기황후(奇皇后’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나라 황제 순제와 기황후 그리고 황태자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며 친원파들이 지은 탑이다
ⓒ MBC
 
딸과 여동생을 팔아 출세한 '아비'와 기씨 '오래비들'을 둘러싼 친원파 세력들은 '기황후'를 등에 없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고려 조정을 쥐락펴락했다. 그들은 고려 왕실에서 가까운 경천사에 원나라 양식의 10층 탑을 세우고 뒷배가 돼준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만수무강을 빌며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석탑의 수난사

고려말 친원파들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개경 경천사에 세워진 석탑은 어떻게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들어오게 됐을까. 여기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 문화재 수난사가 담겨 있다.

고려 왕실의 출입이 잦았던 경천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0층 석탑은 560여 년을 굳건하게 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인박명이라 했듯이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큰 수난을 겪는다.
  
 1960년에 경복궁에 다시 세워진 경천사 10층 석탑
ⓒ 문화재청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식민통치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조선 전역을 돌며 우리 문화재를 조사했다. 1902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라는 도쿄대학 미술사학 교수가 조선땅을 밟는다. 그는 우리나라 전역을 돌며 왕궁, 고분, 사찰, 성곽, 문루, 미술, 공예 등 유적과 유물 전반을 조사했다. 2년 뒤 1904년 이조사를 바탕으로 <조선건축조사보고서>가 발간된다.

이 보고서가 발간되자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07년 무참하게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해 1월 고종의 아들이자 훗날 순종이 되는 대한제국 황태자의 결혼식이 열린다. 일본 국왕의 특사 자격으로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가 결혼식에 참석한다.

평소 경천사 석탑의 아름다움에 군침을 흘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다나카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해 3월 다나카는 이 탑을 해체했다. 주민들과 군수가 나서 반발하자 헌병들을 동원해 총칼로 위협하며 막았다. 한밤중에 해체한 석탑을 소달구지에 실어 개성역으로 운반한 다음 일본으로 가져갔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헐버트 (Home B. Hulbert 1863~1949) 박사. 23살 때 한국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로 독립신문 창간을 도운 언론인이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석탑 강탈 사건을 폭로했다. 죽어서도 한국 땅에 묻혔다. 한강변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 (사)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석탑 강탈 사건'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대한매일신보>는 10여 차례 논설을 실으며 불법반출의 부당성을 알렸다. 외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은 지속적으로 문화재 약탈을 폭로했다.
국제적인 비판 여론이 확산되자 일제는 1918년 석탑을 반환했다. 원래 있던 경천사가 아니라 총독부가 있는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긴 했으나 반출 당시 훼손이 심했던 터라 당시 기술로는 복원이 어려웠다. 해체된 상태로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방치됐다. 1960년에 겨우 다시 세워졌고 1962년 국보 제86호로 지정됐다.
 
 1960년에 경복궁에 다시 세워진 경천사 10층 석탑
ⓒ 국립중앙박물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경복궁에 세워진 석탑은 1995년 다시 해체되었다. 산성비에 약한 대리석 석탑의 훼손이 심해 보존 처리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는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옮겨올 때 경천사 10층 석탑도 함께 세워져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으로 반출된 지 실로 100여 년 만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석탑은 수난을 겪는 사이 상륜부의 원형이 심하게 훼손돼 온전하게 복원할 수 없었고, 탑 내부에 있었을 '사리장엄구'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133호(2022년 11월. 12월)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