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토요일의 친절함이란…버티는 삶과 이기는 삶 그 사이 어디쯤
[퍼즐] 최창연의 원룸일기(9)
병원에서 토요일 근무는 체력과 정신 단련의 장이다. 쏟아지는 일들을 쉬지 않고 해내면서 동시에 친절함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직원이 격주로 근무하기 때문에 물리치료사의 수는 평일에 비해 반밖에 없고, 토요일에는 쉬는 직장인들이 많이 온다. 그렇다면 토요일은 치료사들이 모두 근무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체력과 정신을 단련하더라도 사실은 격주로 쉬고 싶다.
쉴 새 없는 업무와 오래 기다리는 환자들의 불만으로 예민하게 토요일을 보낸다. 누가 실수라도 하면 짜증이 올라온다. 토요일 오전을 보내고 집으로 오면 자괴감이 슬슬 올라온다. 피곤한 채로 집으로 가 점심도 거른 채 낮잠을 자고 나면 어느새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있다. 평소에는 ‘조금 기분 좋은 상태의 사람’ 목표인데, 토요일은 자주 실패한다. 토요일의 나는 이미 미간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그런 모습을 들키지 않고 하루를 넘기려고 애쓴다.
어느 날,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때, 팀의 막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니라. 싸워서 이긴 느낌이에요.’
그날은 환자가 많은데도 손발이 잘 맞는 날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이번 토요일도 잘 넘겼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그저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이겼다’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생각해 보면, 나는 항상 병원에서의 시간은 견뎌야 한다고 여겼다. 이겼다는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병원을 나서며 집으로 가는 대신, 꽃 시장으로 향했다. 병원 앞에서 505번 버스를 타면 남대문 꽃 시장까지 한 번에 도착한다. 버스에 멍하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그의 말을 오래 곱씹었다. 그리고 한참 예민하던 지난 몇 달간의 나에 대해, 이 병원에서 근무한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몸이 고되고, 치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고,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는 순간도 함께 있다. 팀장으로 치료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럽다. 하지만 가장 큰 위로도 팀원들에게서 받는다. 낙상과 같은 사고가 생길 때, 혹은 환자의 불만 사항이 접수되면 바로 알게 되지만 사고 없이 잘 보낸 하루는 아무런 피드백이 없다. 무탈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꽤 노력이 드는데도 말이다. 그 노력을 나라도 알아주고 싶다. 무탈한 하루는 그저 버틴 시간이 아니라, 조금씩 쌓아 올린 시간이라고 믿고 싶다.
회현역에 도착해 3층 꽃 도매 상가로 올라가니 풀냄새가 확 난다. 오전 내내 긴장되어 있던 마음도 풀어졌다. 꽃 시장은 일요일에는 쉬기 때문에, 토요일 오후에 방문하면 저렴하게 꽃을 한 아름 살 수 있다. 즐겁게 구경하다가 마침 세일하고 있는 연보라색 소국을 두 단 샀다. 아래로 내려와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호떡 하나를 먹은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 신문을 펼치고 줄기와 잎을 정리해 유리병에 담았다. 3천 원어치의 국화를 담은 꽃병 하나가 놓였을 뿐인데, 내 방 풍경이 달라 보였다.
그때였다. 나도 이겼다고 생각한 것은. 토요일 오전에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꽃을 사서 집으로 온 나도 오늘은 늘 하던 입버릇에 지지 않았다.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에서 부지런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하루를 다른 문장으로 바꾸자, 버티고 견디던 일상이 작은 승리로 읽혔다. 마음이 조금 더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국화꽃 아래에서 일기를 쓴다. 오늘 승리한 기분에 대해.
최창연 그림작가·물리치료사 puzzlet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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