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 신발' 5조에 팔리더니…이번엔 '못생긴 부츠' 떴다, 왜
2004년을 풍미했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배우 임수정을 기억하는지. 드라마의 인기만큼이나 그녀의 무지개색 니트와 양털 부츠 패션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그해 겨울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거의 모든 이들의 발에는 두툼한 양털 부츠가 신겨 있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양털 부츠가 돌아왔다. 패션계 전반에 복고(retro)가 화두가 되면서 과거를 풍미했던 거의 모든 패션 아이템들이 ‘새삼’ 쏟아져 나오면서다.
서퍼들의 부츠에서 ‘패션템’으로
양털 부츠 중 가장 유명한 브랜드는 ‘어그(UGG)’다. 아예 양털 부츠를 가리켜 ‘어그 부츠’라고 부를 정도로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양털 부츠는 호주의 서퍼들이 서핑 후 발을 빠르게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신었던 것이 원조지만, 호주 출신 서퍼였던 브라이언 스미스가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져와 브랜드로 만들면서 상용화됐다. 역시 LA 서퍼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후 여유롭고 낙천적인 LA 서퍼 스타일의 대명사가 됐다.
국내선 2004년 드라마를 통해 히트를 쳤지만, 미국에서는 그보다 일찍 2000년대 초반부터 할리우드 셀럽들이 즐겨 신으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배꼽티에 짧은 청치마를 입고 어그 부츠 부츠를 신는 것이 그 시대의 ‘국룰(국민 룰의 약자·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라는 뜻)’ 같은 스타일이었다.
잠시 사그라졌던 어그의 인기는 2017년부터 조금씩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당시 ‘아디다스 이지’‘발렌시아가 트리플S’ 등 투박하고 못생긴 ‘어글리 슈즈(ugly shoes)’가 대세가 되면서다. 하이힐이나 구두 대신 투박한 운동화를 신고, 두툼한 고무 밑창이 믿음직스러운 ‘크록스’, 발 건강에 좋을 것 같은 ‘버켄스탁’ 등이 차례로 소환됐다.
어그 매출 75% 신장
이름부터가 ‘못생김’을 함축하고 있는 어그 역시 못생긴 신발을 찾는 패셔니스타들의 구미를 끌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두아 리파, 켄달 제너, 지지 하디드 등 헐리우드 스타들이 배꼽티와 레깅스에 어그 부츠를 신고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올해 겨울에는 블랙핑크 리사, 아이브 안유진 등 국내 아이돌 스타들도 발목이 짧은 어그 부츠를 신고 등장했다. 10~20대들이 즐겨 찾는 소셜 미디어 ‘틱톡’에서 ‘울트라 미니 어그(ultra mini ugg)’ 해시태그(#)는 현재 4300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어그의 인기는 매출로도 증명되고 있다. 어그를 수입하는 신세계인터내셔날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어그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75.1% 신장했다. 부츠 매출이 늘어나는 11~12월을 고려하면 실적은 더 기대되는 상황이다.
글로벌 어그를 전개하는 덱커(DECKER) 아웃도어의 실적도 상승세다. 어그·호카오네오네·테바 등 주로 투박하고 편안한 신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덱커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26% 증가한 29억7000만 달러(약 3조9000억원)를 기록했다.
크록스, 버켄스탁, 어그...“그저 편한 게 좋다”
어그의 인기는 몇 년 전부터 지속하고 있는 ‘Y2K(Year 2000)’ 트렌드와 궤를 같이한다. 일명 세기말 패션으로도 불리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패션이 돌아온 현상으로, 주로 10~20대 Z세대가 이에 열광한다. 배꼽티와 허리를 내려 입는 ‘로우라이즈’ 청바지가 대표적 스타일이다. 어그도 물론 포함이다. 30대 이상에게는 이미 ‘향수’지만, 10~20대에게는 완전히 새롭게 보인다는 점이 Y2K 스타일의 인기 비결이다.
게다가 불편한 하이힐보다 편안한 운동화 차림이 익숙한 Z세대에게 어그는 특별히 ‘복고’를 의미하진 않는다. 딱딱한 부츠 대신 푹신한 양털 부츠를 신는 것은 이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는 스트리트 캐주얼이 대세가 된 지난 몇 년간의 패션계가 추종해왔던 ‘편안함’이기도 하다. 어그가 편안한 디자인과 특유의 보온성으로 이미 유행을 넘어 ‘실용템’이 됐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3월 프랑스 명품 기업 LVMH(루이비통 모에 헤네시) 계열의 사모펀드 엘 카터튼(L Chatterton)은 독일의 신발 브랜드 ‘버켄스탁’을 40억 유로(약 5조 3900억원)에 샀다. 독일인들이 주로 사우나에서 사용했던 이 투박한 신발의 신분상승에도 무엇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최근 패션계 흐름이 반영됐음은 물론이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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