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이 된 미술관…도시를 살리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의 도시 빌바오는 관광 대국 스페인을 대표하는 여행지는 아니다. 하지만 현대 건축을 주제로 한 여행이라면 이곳을 지나치기 어렵다. 현대 건축사의 한 획을 그은 건축물로 평가되는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Guggenheim Museum Bilbao)’ 때문이다. 쇠락하는 도시를 살려낸 ‘빌바오 효과’의 주인공이자,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도 비유되는 미술관을 보기 위해 해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빌바오를 찾는다. 미술관의 강렬한 인상이 전시 작품을 압도하는 바람에 본말이 전도된 건축물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직접 미술관과 마주하는 순간 이런 지적은 금세 잊는다. 천재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hery)의 창의적 발상과 건축의 아름다운 자태에 절로 감탄을 터뜨리며 감동에 젖는 까닭이다. 필자도 이 미술관을 처음 대한 순간 ‘어떻게 건설했을까?’보다 ‘이런 건물을 어떻게 설계했을까?’ 하는 의구심과 감동이 밀려온 경험이 있다.
‘물고기인가? 꽃인가?’ 네르비온 강변의 미술관은 보는 이의 상상력에 따라 형상이 달라 보인다. 어찌 보면 금빛 비늘을 가진 여러 물고기들이 강변으로 올라와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이고, 다시 보면 커다란 꽃이 피어나는 듯한 형상이다. 이 특별한 건축물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대칭도, 비례도, 균형도 무시된 듯 생소한 형태의 건물은 어느 방향에서 봐도 신선하고 역동적이다.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티타늄 패널들은 맑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변함없이 은은하고 아름다운 빛을 낸다.
미술관 외벽 조각조각 이어진 티타늄 패널은 자세히 보면 모두 찌그러져 있다. 이는 건축가의 계산된 의도다. 울퉁불퉁한 평면 덕분에 빛이 서로 다른 각도로 반사된다. 어느 방향에서 봐도 빛이 나고, 꿈틀거리는 듯 역동적인 느낌이 살아나도록 연출한 것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축가의 상상력과 첨단 기술이 만나 예술이 된 건축이다. 1991년 설계를 의뢰받은 프랭크 게리는 직선과 네모로 상상되는 공공 건물의 고정관념을 깨고자 했다. 오래전 그가 직접 밝힌 디자인의 모티브는 물고기다. 물고기의 비늘과 곡선에서 출발한 상상력을 실제 건축물로 구현하기 위해 건축가가 찾은 소재가 티타늄이다. 티타늄은 습도에 강하고 심지어 비가 오는 날에도 빛이 죽지 않는 특성이 있다. 게다가 곡선을 표현하기도 적합하다. 프랭크 게리는 무려 2년간 생산 공장과 씨름 끝에 3㎜ 두께의 비늘 모양 티타늄 패널을 만들어냈고, 약 3만3000개의 티타늄을 사용해 외벽의 금빛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고작 3㎜에 불과하지만, 외벽은 1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유려한 곡선 설계에는 프랑스 항공우주 기업 다쏘가 개발한 카티아(CATIA)가 사용됐다. 카티아는 항공우주 산업과 비행기 제작에 사용되는 3차원 설계 프로그램이다. 건축가의 상상은 원하는 디자인을 기어코 완성해내는 집요함과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혁신적 태도로 현실이 됐다.
놀라운 외관 못지않게 내부 공간도 여지없이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관람객이 처음 만나는 아뜨리움은 고딕식으로 지어진 대성당 느낌이 드는 55m 높이로 웅장함을 자랑한다. 19개 갤러리 중 9개 갤러리가 비정형적 형태의 공간이다. 천장 모양도, 방 크기도 제각각이다. 가장 큰 갤러리는 길이가 130m에 달하고, 벽체와 천장은 비대칭 곡면이다. 이곳에는 미국의 조각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작품이 영구 전시돼 있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은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20세기 인류가 만든 최고의 건물”이라고 극찬했다.
▶ 빌바오 효과의 진짜 힘은 스토리
도시의 상징이 된 건축에는 스토리가 있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에 대한 경외심은 과거 ‘추한 광산 도시’로 불렸던 빌바오를 문화의 도시로 바꾸고, 시민의 삶을 변화시킨 스토리에 대한 감동에서 시작된다.
빌바오는 과거 조선업과 철강 산업으로 부흥했던 도시다. 그러나 1970년대 철강 산업 주도권을 아시아 국가들에 빼앗기고, 바스크 분리 독립 운동 등 정치적 불안까지 가세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빌바오의 선택은 ‘문화’ 중심 도시 재생 프로젝트였다. 시 정부는 세계적 명성이 높았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유럽 분관을 유치했다. 하지만 당시 시민들은 일자리를 늘릴 공장 대신 1억달러를 들여 미술관을 짓는 것에 반대했다. 바스크 문화의 정체성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시 정부의 절실한 설득으로 어렵게 출발한 미술관 프로젝트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1997년 개관 후 1년간 무려 135만명이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았다. 이는 연간 45만명 관람객 유치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코로나19 팬데믹 전만 해도 해마다 100만명 이상이 이곳을 찾았다.
막대한 건축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빌바오는 큰 빚을 졌지만 개관한 지 불과 3년 만에 건설비를 회수했고, 호텔과 컨벤션 등 관련 산업이 발전하면서 일자리도 증가했다. 이 기간 빌바오는 약 4억달러의 경제 효과를 거뒀다. 바로 ‘빌바오 효과’다. 이를 지켜본 세계의 도시들은 저마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과 같은 아이콘 건축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도시가 빌바오 효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건축물 하나의 힘만으로 지역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도시 비전과 문화, 생활, 산업, 자연환경 등 종합적 개발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빌바오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는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노먼 포스터, 시저 펠리, 라파엘 모네오, 자하 하디드 등 세계적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빌바오 시민들은 보는 건축이 아닌 아파트와 도서관 등 일상에서 창의적 건축의 아름다움과 공간을 향유한다. 이것이 진정한 문화 도시로의 변화를 가능케 한 힘이다. 물론, 빌바오 효과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훌륭한 시나리오뿐 아니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주인공의 카리스마가 필수인 것과 같은 이치다. 수십 년, 수백 년이 흘러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건축물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이런 이유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세월이 흐를수록 전 세계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게 될 것임을 믿는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83호 (2022.11.09~2022.11.1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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