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보다 농담 같은 세상, 진담보다 진담 같은 농담

김성호 2022. 11. 11.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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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166]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김성호 기자]

외래에서 오전 환자를 보고 진찰실을 나오던 심영빈 박사는 웬 여자의 쏘는 듯한 시선을 의식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잘 빠진 몸매에 착 달라붙는 검정 원피스, 한쪽 어깨에 길게 늘어뜨린 진홍색 스카프가 도발적이었다. 여자는 모난 턱을 거만하게 치켜들고 몇 발자국 다가오더니, 야아 영빈아, 너 영빈이 맞지?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영빈은 심 박사님 아니면 심 선생님으로 통한 지 너무 오래되어 느닷없이 홀라당 옷벗김을 당한 것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인턴만 돼도 하늘같이 우러러보이는 교수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깍듯이 아무개 선생이라고 부르는 게 그 의과대학의 전통이었다.

그의 장모조차도 언제부터인지 그를 심 서방이라 부르지 않고 심 박사라고 부르고 있었다. 놀란 건 영빈만이 아니었다. 외래 진찰실들이 나란히 붙은 복도 대기실에는 아직도 꽤 많은 환자들이 남아 있었다. 호기심이 자글자글 끓는 듯한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영빈아, 나야, 나 현금이."
"아, 현금이."
"영빈이 너 왜 그렇게 삭았냐? 못 알아볼 뻔했잖아."

그의 체면을 박살낼 듯이 당돌하고 무례한 현금의 말투에 영빈은 모욕감을 느끼는 대신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힘차게 울렁거렸다. -32, 33p

수십년 세월을 무색케 하는 순간이 있다. 종합병원 내과 교수로 오십을 바라보는 영빈에게도 불쑥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현금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하고는 만나본 적 없던 그 계집애가 진료실 문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빈은 너무 놀라 네가 나를 기다렸다니 하고 말했다. 현금이는 내가 너를 왜 기다리냐며 깔깔 웃어댔다. 심 교수로 통하던 그에게 야 영빈아 하는 것이 꼭 그대로 현금이었다.

현금은 이혼녀였다. 적잖은 재산을 받아 나온 현금은 혼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었다. 영빈은 제 자리를 찾아가듯 현금의 곁으로 간다. 수십년 만의 재회가 얼마나 뜨겁고 열렬했던지 그들의 만남을 따르는 내내 나는 나보다도 영빈과 현금이, 그리고 이를 적어내려간 박완서가 훨씬 더 젊다고 느껴졌다.

일흔이 되어 이 장면을 쓴 박완서는 대체 얼마나 정력적이고 열정적인 작가인지 나는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 아주 오래된 농담 책 표지
ⓒ 실천문학사
 
시간이 흘러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농담

<아주 오래된 농담>은 영빈과 늦둥이 동생 영묘,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학병원 교수까지 된 영빈은 중년이 되도록 정해진 길 따라 열심히 달려왔다. 선자리서 만난 아내와는 살갑지도 데면데면하지도 않은 적당한 사이다. 그렇다고 이제껏 누구와 열렬한 사랑을 해본 일도 없는 건조한 인생이다.

사춘기인 딸은 문 닫고 들어가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선 불편하기만 한 평화가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영빈에겐 다용도실이 유일하게 편케 있을 수 있는 공간인데, 제 취향인 물건도 없고 아내가 혼자 있고플 때면 나가달라 말하는 안방이 영빈의 공간일 수 없는 탓이다.

그런 영빈의 삶에 현금이 나타나며 소설은 단박에 진전된다. 격의 없고 자유로운 현금의 태도가 영빈에겐 편안한 자리를 제공한다. 영빈은 점점 더 자주 병원 일을 핑계로 현금을 찾는다.

영빈에겐 현금 말고 소중한 존재가 딱 하나 더 있다. 현금에게 질투를 일으키는 유일한 존재, 동생 영묘다. 어릴 적 산부인과에서 영묘를 처음 보았을 적, 영빈은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한 번에 느꼈었다. 그 마음이 그대로 이어져 시집까지 간 영묘에게 영빈은 모든 것을 내주고픈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고왔던 영묘는 제법 유명한 그룹사의 맏며느리로 들어간다. 소위 끄트머리 재벌 정도는 될 집안으로, 어딘지 꺼림칙한 가풍에 비해 매제가 될 경호만큼은 신뢰가 가 결혼을 허락한 터다. 그러나 영묘의 결혼생활은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다.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흔드는 집안 어른들 탓에 영묘는 늘 쪼들리고 답답한 생활을 이어갈 뿐이다.

돈, 자본주의 그리고 허위의식에 대하여

소설은 위선과 허영, 천박함에 대한 풍자로 이어진다. 재벌가 며느리가 겪는 고난이나 아내를 속이며 애인과 밀회를 즐기는 성공한 의사의 태도, 또 그 주변 사람들의 내밀한 사정따위가 하나하나 드러나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까발려진다.

그 가운데는 우리네 삶 가운데서 크고 작게 겪어봄직한 이야기가 없지 않고, 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면 어디서나 입방아찧어지고 조리돌림 당할 만한 것이어서 박완서의 솜씨가 아니었더라도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만한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에 대하여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제목이 붙은 데도 아주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주된 주제를 꼽자면 역시 허위의식에 대한 게 아닐까 싶다. 환자에게 병을 숨기는 것이나 아내에게 제 마음을 숨기는 것, 가정의 불안을 외면하는 것, 몰래 딸을 지우고 아들을 낳으려 하는 것, 죽음 앞에 돈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것 등은 모두 허울만 좇다 본질을 놓치고 심지어 적극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쾌락이며 이익만 좇으면서도 겉으로는 품위 있는 척 하는 인간들의 보잘 것 없음을 낱낱이 까발리는 이 소설의 솜씨는 과연 오늘의 현실을 향하여서도 오래된 농담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우리는 돌아볼 밖에 없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를, 우리는 정말로 얼마만큼 인간다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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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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