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우리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오해하고 있다"
‘무능한’ 고종, ‘국정 농단’ 명성황후는 오해
소설 통해 잘못 알려진 사실 바로잡고파
[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고종. 역사는 그를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무능한 인물로 자주 부각한다. 명성황후 역시 마찬가지. 업(業)보다는 침략국의 청부폭력배들에게 시해당한 조선의 국모 이미지로 소비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데 과연 역사는 그들을 올바로 기억하고, 바로 전하고 있을까. ‘사실’보다는 누군가의 ‘의도’대로 쓰여진 역사에 희생된 것은 아닐까. 20년간 조선일보에 몸담았다가,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역사 소설 집필에 매진해 ‘왕경’, ‘광개토태왕’ ‘도공 서란’,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를 펴낸 손정미(56) 작가가 이번엔 명성황후와 구한말 역사를 다룬 ‘그림자 황후’(이정서재)를 들고 돌아왔다. 명성황후와 고종이 기울였던 나름의 위국헌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를 지난 8일 마주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소설 ‘그림자 황후’는 명성황후와 구한말 역사를 다루고 있다. 주제 선정의 특별한 이유가 있나.
▲구한말 역사는 ‘망국’, ‘비극’의 무대라 굳이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문화재 비화를 다룬 책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를 쓰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 문화재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내가 알고 있었던 ‘구한말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거나 곡해해서 알고 있었다. 이를 소설로 써서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분심(憤心)이 생겼다.
- 명성황후에 관한 작품은 지금까지 꽤 많이 나온 듯한데. 어떤 차이가 있나.
▲‘그림자 황후’ 집필을 끝낸 뒤 한 포럼에 가서 명성황후에 대한 특강을 했는데, 명성황후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주자 대다수가 매우 놀라워하더라. 명성황후 드라마나 뮤지컬이 만들어져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 명성황후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 보이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내용인가.
▲그동안 명성황후에 관한 왜곡된 이야기 중 하나가 여흥 민씨의 척족을 대거 기용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건 고종의 어머니 역시 여흥 민씨였다는 점이다.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에 나서면서 자신을 보좌할 신하가 필요해 여흥 민씨를 기용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중 명성황후와 정말 가깝다고 할만한 인물은 몇 명 안 되고 대부분 고종과 더 가까운 사이였다.
-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어떤 존재였나.
▲든든한 정치적 동지로, 그림자처럼 보필하며 국정을 함께 이끌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북경에서 외국 서적을 대거 사들여와 이를 섭렵했다. 그 때문에 구중궁궐 안에서도 열강들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파격적으로 차별받던 중인과 서얼, 무관, 상인을 가까이해 개화를 앞당기기 위한 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 지난해 말 경복궁 향원정이 새롭게 단장해 선을 보였다. 이곳은 명성황후가 나름의 외교전을 펼친 곳이라고.
▲명성황후의 명민함과 외교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을미사변 1년 전인 1894년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왕궁 안에 연금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타국을 침략한 것이다. 다행히 서구열강을 두려워했던 일본이 서양인의 출입은 막지 않았는데, 그때부터 명성황후는 선교사와 외교관 부인 등 서양 여성을 향원정으로 초대해 일본의 침략 사실을 알렸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세계를 향해 호소하면서 러시아가 고전하고 있듯이, 명성황후는 전략적으로 조선의 위기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다.
- 고종에게 씌인 무능의 이미지가 일본의 조작이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군인과 청부폭력배들을 보내 조선의 왕비를 시해했다. 일본은 조선의 왕비를 시해한 뒤 이를 합리화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명성황후를 천하의 나쁜 여인으로 몰아갔다. 일본은 1910년 무렵부터 조선 역사를 이런 방향으로 썼다.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권력 투쟁을 크게 부각시키고 고종에 대해서는 얄팍하게 기술해 무능한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다. 통탄할 일은 광복 이후에도 이런 역사 서술 방향이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고종 역시 백성에게 사랑받는 임금이었다. 일본이 고종을 암살하자 거국적인 반일 운동이 일어난 이유다.
-고종은 어떤 인물이었다고 보는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오웬 데니는 고종을 매우 용감하고 현명하며,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항변한다. 데니는 청나라 실세였던 이홍장이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라, 청국의 하수인 처지였다. 그럼에도 고종을 그같이 평가했고 결국 이홍장에 의해 해고됐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선 부국강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개항을 적극 추진했다. 갑신정변 직후 ‘개화’에 치를 떠는 분위기에서도 척사파 신하들의 반대와 조롱을 무릅쓰고 개화에 박차를 가했다.
- 역사 고증에 상당한 공이 들어갔을 것 같은데. 그 과정이 궁금하다.
▲디테일이 살아 있지 않으면 생동감이나 감흥을 일으키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특히 고증에 노력을 기울였다. 궁녀와 궁중에서 쓰던 말투까지 알아봤고, 해관에 대한 부분을 쓰기 위해서는 ‘구한말 해관 직원들’, ‘근대를 여는 창-인천 해관’ 등을 구해 읽었다. 천주교 부분을 쓸 때는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찾아가 당시의 분위기와 그때 기도서 이름이 ‘천주성교공과’였다는 걸 취재했다. 세계 근대 무기체계와 세계 군복에 대해서도 들여다봤고, 무교와 판소리 부분을 쓸 때도 자료를 일일이 찾아서 보았다.
- 고증 과정에서 알게 된 새롭거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나.
▲김옥균과 갑신정변 당시 친일개화파에 로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고종이 박영효를 일본에 수신사로 보냈을 때의 상황을 담은 보고서인 ‘사화기략(使和記略)’을 보면 박영효가 도쿄에서 일본 국왕(천황)을 만날 때 김옥균도 함께 갔고, 당시 일본은 박영효와 김옥균을 극진히 대접해 두 사람의 마음을 샀다. 김옥균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 집에 머물면서 노회한 후쿠자와에게 포섭된 사실도 알아냈다. 결국 조선을 침략을 꿈꾼 이의 지원을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을 획책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다.
- 소설은 어디까지를 픽션, 어디까지를 고증에 기반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은 거의 사실이다. 그러나 ‘초계’ 같은 가공의 인물에 대한 부분은 픽션이 섞였다. 픽션이라 할지라도 당시 상황과 사료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민태웅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고종이 해군 설립을 위해 어렵게 세운 통제영학당 이야기는 사료에 근거한 것이다.
- 소설 속 역사가 오늘날에 전하는 교훈이 있다면.
▲우리는 고종과 구한말에 관해 ‘무능했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를 돌아보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는가 싶다. 수많은 정보가 공개되고 투표를 통해 위정자를 뽑고 있지만 나라는 당파적 싸움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주변국 상황이 심상치 않고 북한의 핵도발 위협이라는 악재도 있다. 구한말에 관해 그렇게 비난하면서도 지금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지 묻고 싶다.
- 소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기대하는 파장은.
▲구한말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조선을 강탈한 가해자 일본을 비난해야지 피해자인 우리를 자학해선 안 된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1년 전 언더우드 여사를 만나 “조선도 미국처럼 행복하고 자유롭고 힘이 있다면!”이라고 절규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명성황후에 대해 명예회복을 시켜 줄 때가 됐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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