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지 “작고 따뜻한 것들로 날 채우고 싶다” [쿠키인터뷰]

이은호 2022. 11. 1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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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겸 배우 정은지. IST엔터테인먼트

왜였을까. 20대 정은지는 ‘서른 살이 되면 ‘서른 즈음에’를 리메이크하겠다’고 팬들에게 여러 번 약속했다. 어린 시절 보컬 트레이너를 꿈꿨던 그에게 ‘서른 즈음에’는 교과서 같은 곡이었다. 정은지는 故 김광석의 음성을 듣고 또 들으며 말하듯 노래하는 법을 공부했다. 계절이 다시 돌아오기를 여러 번. 30대를 코앞에 둔 정은지는 팬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그가 리메이크 음반 ‘로그’(log)를 내놓은 배경이다.

“‘서른 즈음에’가 지닌 쓸쓸함과 공허함이 좋았어요. 그 감정이 저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최근 서울 신사동 IST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난 정은지는 말했다. “처음엔 제가 이 노래를 이해하기에 너무 어린 거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나름 내공이 쌓였나 봐요. 와닿는 가사가 많았어요.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라는 구절이 특히 그랬어요. 나는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은 계속 변하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쫓아다녔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뭘 채우며 사는지 모르겠고…. 녹음하며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부른 ‘서른 즈음에’ 말고도 ‘로그’에 실은 노래들엔 저마다 추억이 켜켜이 서렸다. 타이틀곡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원곡 버즈)은 “어린 시절 방구석 여행을 하게 해줬던 곡”이라고 했다. 하교 후부터 동생이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짧은 자유 시간 동안 초등학생 정은지는 이 곡을 들으며 상상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꼬마 정은지는 노래를 부르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는 “코인노래방에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부르느라 용돈을 탕진했다”며 웃었다.

‘흰수염고래’(원곡 YB)와 ‘꿈’(원곡 조용필)은 정은지의 20대를 안아준 노래다. 그룹 에이핑크로 활동하며 숨 가쁜 청춘을 보낸 그는 두 곡을 들으며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19세 때 고향 부산을 떠난 정은지는 상경한 지 한 달 만에 그룹 에이핑크 멤버로 데뷔했다. “아는 사람은 많아도 내 사람은 없는 것 같은” 외로움, 경험 많은 어른들 틈에서 “모르는 것도 아는 척” 하며 느낀 고독을 그는 음악에 뉘었다. 음악에 새긴 이방인의 시간은 가왕의 마음을 움직였다. 리메이크를 쉽게 허락하지 않기로 유명한 조용필은 정은지의 사연을 듣더니 기꺼이 ‘꿈’ 리메이크를 승낙했다고 한다.

정은지. IST엔터테인먼트

정은지는 어머니를 위한 헌정곡도 음반에 실었다. 김종필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사랑을 위하여’다. 그는 “피아노 학원에서 이 곡을 배웠다. 집에서 멜로디언으로 복습하는데 엄마가 ‘네가 이 노래를 어떻게 아냐’며 놀라셨다. 그때를 떠올리며 불렀다”면서 “엄마에게 미리 노래를 들려드렸더니 옛날이 떠오른다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귀띔했다. 정은지는 2016년 아버지를 위한 노래 ‘하늘바라기’로 음원차트 1위를 달성했다. 이번 ‘사랑을 위하여’를 통해 부모님 전 상서를 완성한 셈이다.

‘미스터 츄’ ‘노노노’ ‘러브’ 등을 히트시킨 ‘청순돌’은 나이를 먹으며 삶을 노래하는 가수로 성장했다. 정은지는 “20대를 떠올리면 승합차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고 했다. 멤버·스태프들과 승합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활동한 기억이 많아서다. 치열하게 보낸 시간은 때로 공허함을 부르기도 했다. 그는 “(한 일이) 엄청 많은 것 같은데, 돌아보면 또렷하게 ‘이거’라고 생각나는 게 없다”고 털어놨다. 모순된 허전함은 ‘서른 즈음에’를 이해하는 단서가 됐다. 정은지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자주 돌아보는 편”이라며 “그래서 ‘서른 즈음에’의 감정이 더욱 와 닿았다”고 말했다.

텅 빈듯한 기분이 자신을 외롭게 해도 정은지는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며 다시 기운을 차린다. 그는 11일 ‘로그’를 낸 뒤 다음 달 단독 콘서트를 연다.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시즌2도 비슷한 시기 공개된다. “20대 때는 몸통 박치기하듯 일한 것 같아요. 그때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는 노련하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하며 살고 싶어요. 큰일을 해내고 느끼는 성취감보단 소소하고 따뜻한 것들이 더 좋아요. 그런 것들로 제 삶을 채우고 싶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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