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할머니라는 놀라운 세계
할머니에게 선물 받은 펜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펜이 따뜻해질 때까지 몇 문장 쓰지 못했다. 마음이 어지러운 탓이다. 마음을 다잡고 읽고 있는 책의 문장을 적었다.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불쌍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사람 자신이 문제의 구성 성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풀어야 하니까 더 불쌍한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 ‘인생의 역사’의 ‘책머리에’ 속 문장이다. 문장을 필사하고 잠시 펜을 찬찬히 살폈다. 인생의 문제는 내가 풀어야 하지만, 함께 풀어준 인연들이 있었기에 내 세상은 나아졌다고 믿는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공유하면 불쌍한 인생은 경이로워지기도 한다.
내게 펜을 선물한 할머니는 올해 ‘교보손글씨대회’에서 으뜸상을 차지한 김혜남 선생이다. 손글씨대회라는 말이 정겹고, 수상한 글씨들이 예뻐서 늘 관심을 갖고 보았다. 올해 유독 내 눈길을 끈 것은 최고상 수상자가 역대 최고령인 82세 할머니라는 것과 필사한 ‘음식과 문장’이 내가 근무하는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라는 것이다. 글씨가 하도 정갈하고 따뜻해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한 글자연구가가 내년에 ‘김혜남서체’를 세상에 내놓을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음식과 문장’의 저자는 한국에 귀화한 일본인 요리 선생 나카가와 히데코. 서울 연희동 요리교실에서 요리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삶을 재정립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 할머니 눈에 띄었다. 그는 책을 읽으며 요리 공간을 상상하고 맛있는 생활을 떠올려보았다고 고백했다. 히데코 선생은 할머니를 그 공간에 초대했다. 출판사 대표 자격으로 나도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두 분의 만남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 속담에 ‘복숭아와 밤은 3년, 감은 8년’이라는 말이 있다. 과일나무를 심으면 열매를 맺기까지 그에 상응하는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성취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복숭아나무와 밤나무를 심고 3년이 지나야 열매가 열리듯 화진의 빵집도 3년이 지나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했다. 다만 아쉽게도 계속해서 성장해나가는 타이밍에 문을 닫게 됐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겠지만, 화진은 가게를 접은 지 1주일밖에 지나지 않아 초심을 되찾고 그동안 해보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됐다.” 요리교실에서 만난 사람의 빵집 창업기, 그 시행착오를 거듭한 삶과 도전 정신에 마음 끌린 할머니는 이 대목을 필사해 손글씨대회에 출품했다. 수상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퇴직 후 20년 동안 성경 한 권을 통째로 필사하는 작업을 열네 번 반복했다. 마음을 다스리고 손의 감각으로 전해오는 말씀들을 인생에 담기 위해서다. 초대 자리에 그 많은 필사 노트 중 몇 권을 갖고 오셨는데, 눈이 휘둥그레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글자 간격과 크기까지 일정해 쓰는 사람의 집중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수양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놀라운 결과물이었다. 20년 필사하는 동안 한 가지 펜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번 상금으로 넉넉하게 구한 그 펜을 주위에 선물하고 있다고 했다. 저자와 수상자가 책을 통해 맺은 인연으로 만난 자리에서 펜 한 자루를 선물 받았으니 이것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다. 특별한 펜 덕분에 나도 자꾸 노트를 펼친다. 눈으로 읽었던 문장을 손으로 각인한다.
언젠가 김연수 작가가 장래 희망은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 해서 많은 문학 독자의 환호를 받았다. 남성 작가의 할머니에 대한 꿈은 독일의 103세 어른을 보고 생긴 것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할머니는 세상에 분명히 악이 있음에도 선함을 보며 살아가고 인생에 감사해 했다. 김 작가는 ‘인류의 형태 중 할머니가 제일 훌륭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배우고 익히는 자세로 꾸준히 책을 읽고 문장을 필사하는 것. 사람들에게 펜 한 자루를 선물하는 마음. 다시 한번 할머니라는 놀라운 세계에서 선함과 희망을 본다. 우리의 장래 희망도 이제 할머니로 하자.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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