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년 산책] 철학과 함께한 70년, 지금도 희망을 찾는다
중학생 때 ‘인간 문제와 그 해결’ 같은 생각을 정리해 보면서 문학·종교·철학책을 많이 읽은 것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철학과를 선택했던 것 같다. 그 시대에는 인문학적으로 융합된 사고나 학과가 없었기 때문에 철학은 독립된 학문이었다. 우선 서양 철학자 중에서 관심과 문제의식을 같이하는 개인들에 관한 강의와 연구가 중요했다. 그때는 칸트와 헤겔은 누구나 한번은 연구해야 하는 철학자로 꼽혔다.
학위논문을 쓰는 사람은 한 개인 중에서도 한 가지 주제를 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본의 철학교수 대부분이 그랬다. 어떤 교수는 헤겔을 연구하다가 헤겔의 우물에 빠져나오지 못했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독일에서도 헤겔학파가 생겼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칸트·헤겔·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전공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는 중에 영국·프랑스·독일철학사를 비교하게 되면서 개인 연구 영역에서 탈피하여 우리 사회와 시대에 어떤 철학이 요청되는가를 문제 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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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생 때부터 인간 문제를 탐구
과학만능 뒤에 숨은 인간성 상실
철학은 존재와 역사에 대한 고민
사랑과 생명의 세상 열어가는 힘
」
나는 왜 철학을 전공하게 됐나
그뿐만 아니라 철학은 상아탑의 고립된 학문이 아니고 사회와 역사를 포괄하는 성격의 학문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역사학자는 역사를 연구하다가 역사철학의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철학과 관련이 없이 출발한 법학은 연구가 깊어질수록 법철학의 문제에 직면한다. 법철학 기반 위에 법학이 존재한다는 견해에 이르기도 한다. 법과 선악의 문제는 불가분리의 관련성을 가지며 그 배후에는 윤리문제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으로 출발한 철학이 사회철학으로 발전하면서 정치 사회문제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철학보다 철학적 사유와 해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철학적 사유가 있는 학문은 뿌리를 갖춘 학문이 될 수 있으나, 철학적 사유가 없는 학문은 기반이 없는 시대적 건축물 같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가진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 역사철학의 필연성을 암시해 준다. 마르크스 유물사관은 이미 과학의 영역을 넘어 철학적 세계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적 사유란 어떤 것인가. 두 가지 성격은 뚜렷하다. 모든 사물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는 자세이며, 어떤 현실에 접하든지 근원적인 실체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특정 사회나 국가의 역사를 연구하던 학자가 세계사 전체를 탐구하게 되면 자연히 과학적 관찰에서 철학적 사유로 옮아가게 된다. 영국의 A 토인비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문학·회화·음악의 본질을 추구하던 예술가가 예술세계 전체를 문제 삼게 되면 예술철학, 즉 미학에 관심을 갖는다.
철학 없으면 지도자 될 수 없어
각자의 인생관이 자라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발전하는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철학은 세계관 추구의 학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신의 철학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당신이 가진 정치관·사회관·역사관을 포함한 세계관은 무엇인가와 맥을 같이한다. 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자. 그의 주변에서는 물론 생각 있는 국민은 대통령의 철학 운운한다. 철학을 갖춘 사람은 지도자 자격이 있으나 아무런 이념, 즉 철학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철학도 없는 지도자는 목표가 없는 운전자와 같아지기 때문이다.
사물의 근원을 찾는 철학자는 ‘존재’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계속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존재는 논리의 대상이 아니고 팩트(Fact), 사물과 사건에 관한 연구로 바뀌고 있다. 그러는 동안 철학의 초창기부터의 과제였던 형이상학(Metaphysics)은 점차 철학 무대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현실성과 삶의 실용성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또 과학이 계속 진화하면서 철학의 무대가 점차 축소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철학은 “집을 하늘에서 지어 내려온다”고 비판한다. 그래도 철학자는 “과학자는 집을 어디에 왜 지어야 할지 모른다”고 반론하는 상황이 되었다. 철학이 리어왕으로 있을 과거에는, 과학의 딸들이 부왕의 뜻을 따랐으나 노쇠한 후에는 부왕이 딸들의 집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현대인은 생각한다.
나도 70여 년 동안 철학계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철학이 학문계에서 밀려났거나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겪어 온 과정과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해결은 철학에 주어진 과제이며 책임이다. 철학과 내 친구들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위기는 ‘가치관의 상실’이라고 걱정한다. 정치, 경제, 과학문명, 기계과학의 미래 등 문제는 산적해 오는데 건설적이고 영구한 가치관은 보이지 않는다는 호소다.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갈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철학 부재에서 오는 결과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나
과거에는 종교적 가치관이 있었고, 동양에는 인간존중의 윤리관이 있었다. 과학만능 사회가 되면서 인간 스스로가 인간의 가치를 소외시키거나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시대가 끝났다는 탄식이다. 나도 70여년 철학과 더불어 살아왔으나 아직도 ‘인간 문제와 그 해결’은 새로운 과제로 남아있다. 지금과 같은 역사와 사회의 현실 속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3000년의 철학적 사유와 가치관은 무엇인가. 가장 소중한 것은 휴머니즘(인간애)의 정신이다. 선으로 향하는 자유의 창조력이며 인간성 회복과 주어진 목적을 채워가는 사랑의 구현이다. 모든 문화의 출발과 목표도 거기에 있었고, 철학은 그 중추세력이 되어 왔다. 그것이 역사의 희망과 생명력이 되어야 한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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