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잘못된 기록도 남겨두어라, 후대가 판단할 것”

2022. 11. 1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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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화의 자존심 ‘실록’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어떤 시대나 인물을 판단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과거는 늘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인간의 인식마저 믿을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가끔 그 모호함을 관통하는 유력한 기준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중 조선시대 사람들의 자존심을 이해할 수 있는 기준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미 『조선실록』을 남긴 사관(史官) 제도를 다루었는데(중앙일보 2021년 4월 30일자 25면), 그때 잠깐 언급했던 적이 있다.

나는 역사학의 핵심은 해석이 아니라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에서 해석이 없어도 사실은 남지만, 사실이 없으면 해석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역사학의 모든 논쟁은 기본적으로 사실을 둘러싼 기억의 투쟁이라는 성격을 띤다. 그래서 ‘역사는 해석’이란 말도 일리는 있다.

「 역사학의 핵심은 해석보다 사실
조선실록은 ‘팩트와 기억의 투쟁’

선조·현종·숙종·경종실록 재편찬
역사 고치면서도 예전 기록 남겨

지난 흉허물도 바로보려는 노력
‘역사는 승자의 기록’ 냉소 넘어서

사화는 공론이 무너질 때 발생

‘기록의 나라’ 조선은 활자의 나라였다. 왕조실록도 초기엔 직접 손으로 쓰다가, 이후 활자로 간행했다. 『현종실록』을 찍을 때 사용된 금속활자. 실록 간행을 위해 처음으로 제작된 금속활자다.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 혹은 8대 사화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소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사화는 첫째, 공론(公論)의 작동이 중단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개인 또는 특정 세력의 무고(誣告), 권신(權臣)의 야욕, 국왕권의 자의적 행사 등이 계기가 된다. 둘째, 어떤 경우든 국왕권의 폭력적 행사로 진행된다. 셋째, 그 폭력성은 상당 규모의 인명 살상을 낳는다. 이 과정에서 조정을 꾸려갈 정치세력의 교체가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여러 사화 중에 ‘역사-기억을 계기로 벌어진 탄압’이라고 불린 사태가 주지하듯이 무오사화(1498, 연산군4)였다. 이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김종직(金宗直)의 ‘의제를 조문하는 글[弔義帝文]’을 실었다.

그 내용은 항우(項羽)에게 살해당한 진나라 의제(義帝)를 애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세조(수양대군)가 단종을 시해한 일을 비유했다며 이극돈(李克墩)이 연산군을 부추겨 김일손 등을 죽였다. 이 사건으로 성종 때 정계로 진출했던 사림들이 화를 입었다. 이는 역사기록인 사초로 인해 당한 사화여서, 역사 사(史)자를 쓴 사화(史禍)라고도 부른다.

사화(史禍)는 당대 역사에 대한 기억-투쟁의 극단적 형태이다. 기억-투쟁은 사화 같은 방식 외에도 사실을 둘러싼 각 주체 간의 미묘한 신경전과 논쟁으로도 나타난다. 『조선실록』에도 그 대립의 증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수정’ ‘개수’ ‘보궐정오’의 차이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네 차례 다시 고쳐 썼다. 선조·현종·경종실록과 이후 편찬된 수정본. [중앙포토]

건국 200년이 지나면서 조선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조선 문명의 일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실록 편찬의 변화도 그중 하나였다. 그 변화란 ‘수정’ 또는 ‘개수’라는 이름으로 이미 편찬된 실록을 다시 편찬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누구나 조선실록 홈페이지(sillok.history.go.kr)에서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실록(고종, 순종을 합치면 27대)의 원문(사진, 텍스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요즘은 실록만이 아니라 많은 사료에 쉽게 접속해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부지런한 독자라면 자신이 읽은 역사연구 논저를 검증하며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선실록 홈피 첫 화면을 보면 이상한 게 있다. 다른 실록은 모두 한 종인데, 선조·현종·숙종·경종 실록은 두 종이 남아 있다. 함께 겪은 시대나 상황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기억하는 주체들이 개수(改修), 수정, 보궐정오(補闕正誤)라는 이름으로 그 다름을 표출한 것이다.

『선조실록』의 수정은 실록의 역사에서 처음 있었던 ‘역사 고치기’였다. 인조반정 이후 『선조실록』이 무사(誣史·왜곡된 역사)라는 논의가 제기되어 수정이 시작되었는데 호란 등으로 『선조수정실록』은 20여 년이 지난 효종 때 완성되었다. ‘수정’이란 말은 ‘부분 재편찬’이란 뜻이다.

『현종실록』은 북인계와 남인들이 주도하여 편찬하였는데, 경신년 환국(1680)으로 조정의 주류가 바뀐 뒤 서인이 주도하여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하였다. 개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전면 재편찬’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종실록』보다 『현종개수실록』의 양이 더 많아졌다.

“부정확한 사실 바로잡겠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역대 실록의 원문과 번역문을 볼 수 있다. [뉴스1]

한편 『숙종실록』의 수정에는 ‘보궐정오’라는 표현을 쓴다. 빠진 데를 추가하고, 잘못된 곳을 바로잡았다는 뜻인데, 고친 데는 몇 군데 되지 않는다. 『숙종실록』에 대한 보궐정오는 1728년(영조4)에 이광좌(李光佐) 등 소론(少論)이 편찬하였다. 아무래도 노론과 소론이 분당될 때의 과정과 배경에 대한 서술에서 두 실록의 차이가 크다.

『경종실록』의 수정은 영조를 지나 정조 때인 1778년(정조2)에 편찬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편찬 중이었던 『영조실록』과 함께 진행되었다. 『경종실록』이 소론의 주도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정조와 노론의 입장에서 역사를 다시 편찬한 것이었다. 특히 1721~1722년에 벌어진 노론에 대한 탄압이었던 신임사화(辛壬史禍)에 대한 일부 부정확하고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겠다는 취지였다. 그럼에도 두 실록은 신임사회를 비롯한 현안에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개수가 아닌 수정에 그쳤을 것이다. (허태용, 2013)

학계에서 실록의 개수(수정)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오항녕, 2018)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리한다면 이러하다. 예컨대 『선조실록』의 수정은 대제학 이식(李植)이 주관하였는데, 기본 방향은 ①사실의 보완, ②해석의 수정이었다.

『선조실록』은 사료 부족을 숙명으로 안고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수정할 때 곳곳에서 자료를 수집하였고, 그 결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동서 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중 행재소 이외의 기록, 이를테면 의병 활동, 수군 활동, 민간 동향이 대폭 보완될 수 있었다. 조헌 등의 의병 활동, 이순신 장군의 승전 기록은 『선조실록』보다 『선조수정실록』에 많이 나와 있다.

유성룡·이항복에 대한 재평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 ‘신국보보물전’에 나온 조선왕조실록. [뉴스1]

또 다른 수정 방향은 ‘해석의 수정’인데, 이는 주로 사론, 즉 사관의 논평을 수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서는 유성룡과 이항복에 대해 각각 “어머니를 봉양한다면서 술만 마셨다, 국정에 한 일이 없다” “기축옥사 때 정철과 함께 서울, 영남, 호남의 사림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유성룡에 대해 “학문이 깊었고 효성스러웠다, 임진왜란에 공이 크다”, 이항복에 대해 “기축옥사 때 이항복의 주선으로 살아난 사람이 많다”고 고쳐 기록하였다.

주목해야 할 기본 원칙 중 하나는 실록을 수정 또는 개수하면서 이전 실록을 그대로 두었다는 점이다. 『선조실록』 수정 당시 ‘잘못된 역사’로 낙인찍힌 『선조실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아예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둘 다 볼 수 있다.

왜 없애지 않았을까? ‘주묵사(朱墨史)’를 수정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주묵사란, 원래의 검은 먹으로 된 기록을 빨간 먹으로 수정하여 서로 구별하고 고친 데를 알 수 있게 했던 고사에서 나왔다. 『선조실록』을 수정할 때 만들어진 주묵사 원칙은 이후 『현종실록』의 전면 개수, 『숙종실록』의 보궐정오로 이어졌다. 정조(正祖) 때 『경종실록』을 수정한 뒤에도 정조는 주묵사의 비유를 들어 『경종수정실록』과 함께 『경종실록』을 남겼다.

역사 앞에서 스스로 객관화할 수 있는 자존심. 이러한 태도는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냉소를 넘어설 수 있게 한다. 나라면 어땠을까? 기존 실록을 불살라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지 못했을 듯하다. 내 흉허물을 감추고 지우면서.

■ 이태원 참사,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 그 이듬해 7월 어느 날, 고등학생들과 1박 2일로 인문학 포럼을 했다. 역사의 해석 문제가 거론되었다. 나는 역사에 대한 냉소를 경계하며 ‘역사는 승패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불만을 넘어 분노가 가득했다. “지금 세월호 침몰은 진상조차 밝히지 못했습니다. 결국 승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발표되고 파묻히는 거 아닙니까. 이런데도 어떻게 역사에 승패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희생자들과 같은 고등학생이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내 생각을 말해야 했다. “그건 승패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상을 밝히는 것과 밝히지 않는 것은 정의와 불의의 문제지요. 세월호 사건 자체는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비극이고!”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한데 다시 희생자 대부분이 젊은이인 참사가 일어났다. 이 사회는 이 당대사를, 이 참담한 비극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우리의 자존심을 묻고 있다.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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