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탁의 시선] 진짜 웃기고 있다
“장관 강령에 의회를 잘못 이끌면 사의를 표하게 돼 있는데, 본인에게도 적용되나.”(키어 스타머 영국 노동당 대표)
“물론이다. 하지만 수사에 대한 질문이라면 답할 수 없다. 당신이 변호사라 잘 알지 않느냐.”(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인정한 것 같다. 파티가 없었다고 말했으니 사임할 건가.”(스타머)
“아니다. 노동당의 문제는 당 대표가 리더가 아니라 변호사라는 점이다.”(존슨)
“거짓말쟁이 리더보다 변호사가 이끄는 당이 낫다.”(로이드 러셀-모일 노동당 의원)
정치는 말로 하는 경쟁이다. 의회 정치가 시작된 영국도 그렇다. 매주 수요일 하원에서 열리는 ‘총리 현안 질의’(PMQ)가 생중계된다. 지난 1월 야당인 노동당 대표는 방역 수칙을 어기고 파티를 연 존슨 당시 총리를 몰아세웠다. 나중에 사임했지만, 존슨이 물러서지 않으면서 회의장은 시끌벅적했다. 발언이 나올 때마다 여야 의원들이 동의한다며 ‘hear’라고 소리쳐서다. 매주 공방이 불을 뿜지만 여야 의석 중간에 넘어서는 안 되는 붉은 선이 그려져 있다. 영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토론장 모습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국회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질의가 이어지고 있다. 현안 질의 등에서 공직자들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다. 그런데 대통령실에 대한 국회 운영위 감사에서 김은혜 홍보수석이 ‘웃기고 있네’라고 적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강승규 시민사회수석과 사담을 나누다 적었다며 사과했지만, 150명 넘게 숨진 참사를 다루는 자리에서 나와선 안 될 표현이었다. 다른 공직자들도 웃는 듯한 모습을 보여 지적을 받았다니 국정 최고 책임기관에 있는 이들의 참사를 대하는 태도로 부적절했다. 이런 장면이 정말 국민을 웃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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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질의 때 두 수석 부적절 행동
의원 자질도 문제지만 국회 무시 곤란
싸우더라도 해법 찾는 정치 복원해야
」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공직자들이 반론 제기를 넘어 반발하거나 비아냥대는 모습을 보는 게 낯설지 않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의원들의 질의나 의혹 제기 수준이 떨어진 것이 한 원인이다. 이태원 참사 질의에서 일부 야당 의원은 여당 의원보다도 준비를 해오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거대 민주당보다 비례대표 한 명뿐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참사 당일 용산구청장의 경북 사적 방문 의혹을 자료로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김의겸 민주당 의원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것도 함량 미달 사례다. 의혹이 있다면 장소나 정황 증거를 파악하는 등 최대한 검증 과정을 거쳤어야 할 텐데 제보라며 툭 던졌다. 한 장관은 “제가 직을 포함해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뭘 걸겠느냐”고 맞받았다. 이런 현상이 현 정부 들어 생긴 것도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국회에서 아들의 특혜 휴가 관련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소설을 쓰시네’라고 했었다.
의원들의 준비에 부족함이 있더라도 공직자들이 대놓고 국회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행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며 국가 정책을 결정한다. 보좌관과 비서관 몇 명이 고작인 의원은 소속 상임위 부처 돌아가는 것도 파악하기 버겁다. 거대 관료조직이 쥔 정보에 비하면 의원 개인의 힘은 부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에 정부 기관들이 응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법률 제정과 함께 행정부 견제는 입법부의 중요한 기능이다. 임명직 공무원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헌법기관의 존재 이유를 망각해선 곤란하다.
국회의 권위 상실은 삼권분립 한 축의 기능 약화를 뜻하는 만큼 막아야 한다. 이러려면 당사자인 정치인들이 여야로 대립만 해선 곤란하다. 정치는 사라지고 정쟁만 남았다는 지적을 정치인들은 사형 선고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의 협조를 전혀 받고 있지 못한 윤 대통령도 성과를 내려면 달라져야 한다. 미국 중간선거 다음 날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 될 것으로 예상되자 조 바이든 대통령의 일성은 “공화당 동료들과 함께 일할 준비가 돼 있다”였다.
여야 정당의 가치 대립이 지금보다 심하던 시절에도 정치가 담론을 주도하던 문화가 있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 고 박상천 법무부 장관이 여야 대변인과 원내총무 등으로 맞수였던 시절이 대표적이다. 학력 등 공통점이 많았던 이들의 촌철살인 논평과 토론에는 논리와 비유가 담겨 있었다. 대립하되 품격을 잃지 않았고 막후에서 갈등을 조정해내기도 했다. 박 장관이 세상을 뜨자 박 전 의장은 “난 한 마리 짝 잃은 거위”라고 추모했다. ‘웃기고 있네’ 메모 논란을 일으킨 두 수석은 공교롭게 국회의원 출신이다. 더는 국민을 웃기지 말고 정치를 복원해 달라.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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