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러’ 박재혁 “젠지는 나의 집…올해 내내 행복했다”
데뷔 후 처음으로 이적 시장 나오기로
젠지 ‘룰러’ 박재혁이 생애 처음으로 이적 시장에 나온다. 그는 2016년 젠지의 전신 삼성 갤럭시에서 본격적인 프로게이머 커리어를 시작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젠지가 영광을 누렸을 때도, 좌절을 겪었을 때도 그는 늘 그곳에 있었다.
젠지는 10일 SNS 채널을 통해 박재혁을 FA로 내보낸다고 밝혔다. 애초 계약을 1년 연장할 수 있는 팀 옵션이 있었으나, 박재혁이 그동안 팀에 헌신한 것에 대한 답례로 조건 없이 그를 내보내기로 했다.
같은 날 오후 젠지 사옥 근처에서 박재혁을 만났다. 젠지가 SNS 채널을 통해 그와의 작별 소식을 전하기 약 2시간 전이었다. 그는 아마도 마지막으로 젠지 유니폼을 입고서, 자신이 왜 프로 생활 내내 몸담았던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는지를 털어놨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젠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왜 이적 시장에 나오기로 했나.
“한 팀에만 오래 있었다 보니 편했다. 이 팀에서 선수 생활을 더 이어 나갈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늘 나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궁금했다. 나는 데뷔 후로 단 한 번도 이적 시장에 나가본 적이 없다. 내가 현재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다.”
-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이적 시장에 나오기로 결심한 건 올해 롤드컵 4강전이 마무리된 뒤였다. 롤드컵 일정을 마친 후 혼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며 향후 진로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지금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 이 정도면 이적 시장에 나가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선수와 젠지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 아닌가. 이런 결심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결국 내가 원하는 바와 회사가 원하는 것이 달랐다. 지금도 젠지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만,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싶었다. 이적 시장에 나가면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장 평가가 궁금했던 것도 맞지만 젠지에 잔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므로 그동안 팀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결과적으로는 아쉽게 됐다.”
-올해 LCK 우승과 롤드컵 4강 진출을 기록했다. 팀의 성적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나.
“팀이 올해 실패했다고 보진 않지만 성공했다고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젠지에서만 활동해왔으니까. 다른 팀의 스케줄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코칭스태프는 어떻게 피드백하는지, 연습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선수들은 어떻게 지내는지가 궁금했다.”
-젠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이번 결정에 따른 아쉬움은 없나.
“아쉬움이 많다. 프로게이머를 은퇴한다면 이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지금도 아쉬운 마음이 크게 든다. 하지만 스스로 내린 결정인 만큼 아쉬워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선호하는 차기 행선지가 있나.
“1순위는 LCK 팀, 그다음은 LPL 팀이다. LPL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본인에 대한 이적 제의가 있었는지 팀에 물어보곤 했다고 들었다.
“늘 내 시장 평가에 대한 호기심이나 궁금증이 있었다. 젠지와 계약을 하긴 했지만, 이맘때가 되면 날 찾는 팀이 있을지 걱정이 있었다. 팀에 나와 관련된 이적 제의가 없었는지 물어본 것도 궤가 같다. 이번엔 스스로 실력에 자신감이 넘치다 보니 이적 시장에 나가는 게 맞겠다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기량이 은퇴할 때까지 우상향 그래프를 그릴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감이 넘친다.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시장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은 같은 프로게이머들끼리만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주변에서 잘한다는 평가를 받고, MVP를 수상하고, 같은 프로게이머들이 롤모델로 삼는다고 말을 해도 ‘가치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은 충족되지 않는 것인가.
“선수들이 좋은 평가를 해주면 뿌듯하지만 그게 밥을 먹여주진 않는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내가 프로 생활을 할 날이 앞으로 길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선수 생활을 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단 생각이 들어서 FA 시장에 나가기로 결심한 것도 있다.”
-왜 프로게이머 생활을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나는 프로게이머 생활을 오래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보다는, 스스로 생각해둔 은퇴 시기가 있다. 그게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기간에 최대한 좋은 대우를 받고, 팬들께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FA 시장에 나오는 것이다.”
-젠지에 오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
“올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개인 방송에서도 흘리듯 얘기했던 얘기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연습 과정이 언제나 힘들었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빨리 대회 경기를 치르고 싶더라. 과거에는 ‘대회를 치르기 싫다’ ‘무섭다’는 생각이 조금씩이라도 있었는데 올해는 ‘빨리 대회를 치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지금 내 실력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올해 내내 즐거웠다.”
-왜 올해는 유독 부담감 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부담감 없이 게임을 했다. 그래서 내 실력의 100%를 보여줄 수 있겠단 자신감이 있었다. 대회를 치르면서 모든 1분 1초가 즐거웠다. 나는 부담감이 심해지면 기량이 저하되는 스타일이다. 올해는 부담감을 일절 안 느꼈다. 팀원, 코치, 감독님, 회사 직원분들…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던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팀에서 나올 만한 멤버나 프런트와의 불화가 있었나.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팀원들과의 관계는 좋았다. 오히려 ‘이 팀은 신기할 정도로 불화라든지 이런 게 하나도 없구나’ 싶을 정도였다. 이 친구들 덕분에 내가 더 편하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팬들 사이에서 억측이 나올 만도 하겠지만, 불화 때문에 나가는 건 절대 아니다.”
-젠지에 몸담았던 동안 가장 고마웠던 사람을 한 명 꼽는다면.
“이지훈 단장님이다. 날 많이 걱정해주시고 많이 챙겨주셨다. 늘 감사하게 느낀다. 이번에도 나와 (내년을) 함께하고 싶어 하셨다. 그게 감사하고 또 아쉽다. 올해 처음으로 함께했지만 고동빈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나누고, 재밌게 게임을 즐겼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젠지의 상징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젠지 팬들은 몹시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오랫동안 나를 응원해주셨던 만큼 많이들 놀라실 것이다. 속상하실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속상하니까…. 하지만 내가 프로의 세계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룰러’라는 선수와 젠지라는 팀을 응원해주시면 감사하겠다. 그 응원에 걸맞게 더 어른스러워지겠다. 어느 팀에 들어가더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 염치없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
-멀지 않은 시기에 은퇴할 계획이 있다고 했다. 당장 내년에라도 그만둘 생각이 있는 것인가.
“다행히 내년보다는 더 오래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 사실 올해도 힘들어서 ‘올해까지만 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내 실력에 은퇴하기는 너무 아쉽더라. 당장 내년 은퇴할 생각은 없으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앞으로 길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짧게만 하고 그만둘 생각은 아니다.”
-보통 최대한 오래 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기량이 감소하는 걸 보기 싫은가.
“앞으로 몇 년 더 프로게이머 생활을 해도 기량이 떨어질 것 같진 않다는 자신이 있다. 그런데 이 생활을 길게 하고 싶지 않다. 이번 롤드컵을 치르면서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롤드컵이 정말 많이 힘들었다. 세상은 돌고,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변하는데 나 혼자만 여기 멈춰 서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프로 생활을 지속하면 앞으로도 이런 느낌을 자주 받을 텐데, 오래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쉴 새 없이 쳇바퀴를 도는 삶에 지치기도 했다.”
-프로신에서의 경쟁력과 별개로 삶이 정체됐다는 느낌을 받고 있나.
“나는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성숙해지고, 좋은 쪽으로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정말 (게임 외에는)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다. 쉬는 날에 같이 놀 사람도 없고, 하루를 마친 뒤 숙소에 와서 씻고 누우면 연락할 사람들도 없다. 그런 것들이 너무 어려웠다. (선수 생활을)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려 하지만, 아주 오래는 안 해야겠다고 확신을 가졌다.”
-아이러니하다. 베테랑들의 도전이 화제인데 박 선수는 최고 전성기에서 은퇴를 고민한다.
“은퇴 시기가 남들보다 빠를 뿐이다. 은퇴 전까지는 목숨 걸고 할 생각이다.”
-박 선수가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얻는 낙은 무엇인가.
“…정말 없는 거 같다…. 내가 무엇으로 스트레스를 푸는지도 모르겠고…. 잠깐만요. (눈물을 훔치며) 인터뷰하면서 울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이번에 정말 롤드컵 우승을 하고 싶었던 게… 찾아보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처음에는 단지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게임이 취미다 보니까 이 일을 막연하게 좋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모르겠더라. 내가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는지를…. 결국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할 거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다. 은퇴 전까지 스스로 답을 찾았으면 좋겠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무엇을 위해서 스트레스받고 있는지….”
-박 선수를 오래 봐왔지만 카메라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는 어쨌거나 대중에게 드러나는 직업을 갖고 있다.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내가 힘들어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분들도 우울해지실 것 같다. 그런 모습은 최대한 보여드리지 않으려 한다.”
-박 선수에게 젠지는 어떤 의미인가.
“젠지는 나의 집이다. 외출하고 싶으면 외출하고, 어딜 다녀와도 편안하게 돌아와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게임하고 싶으면 게임하고, 쉬고 싶으면 쉴 수 있는 집이다. 구성원 중에서도 가족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많다. 젠지는 내 집이었던 것 같다. 다들 나를 따뜻하게 대해줬다. 나도 그들에게 따뜻했다. 젠지라는 집에서 직원분들과 밥도 자주 먹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면서 재밌게 놀았다.”
-젠지 유니폼을 입고서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젠지와는 정말 좋게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나왔지만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웃음)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거고. 어떤 결말이 나오든 ‘룰러’와 젠지를 많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서로를 응원하면서 살아갔으면 한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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