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과학계는 왜 하버마스를 버렸나
이시윤 지음
파이돈, 532쪽, 2만5000원
“한국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수많은 서구산 수입 이론들이 명멸해 갔지만, 위르겐 하버마스만큼 전면적이고 광범위한 수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1990년대에만 175편의 하버마스 연구논문이 발표됐고, 하버마스 관련 논의에 참여한 학자 수는 70명이 넘는다. 하버마스의 관련 책은 1980년대에 역서 8종에 이어 1990년대에 16권의 역서와 13권의 연구서가 나왔다. 1993년에는 하버마스-비판이론 전문연구단체를 표방한 학회 ‘사회와철학연구회’가 결성됐다.
하버마스 신드롬의 절정은 1996년 4월에 있었던 한국 방문이었다. 하버마스가 2주간의 방한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강연장과 행사장마다 수천 명이 몰려들었으며, 언론들은 그의 동정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팝스타를 방불케하는 하버마스의 인기는 방한 이후 급속히 냉각됐다. 90년대 말까지 하버마스 연구를 이어간 학자는 거의 없었다. 2000년을 전후로 국내 학술영역에서 하버마스에 대한 담론은 사실상 소멸했다. 이는 2000년대 하버마스의 세계적 명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었던 상황과 대비된다.
사회학자 이시윤이 2021년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쓴 ‘하버마스 스캔들’은 하버마스의 국내 수용 과정을 살펴보면서 이례적 열기와 드라마틱한 소멸의 원인을 규명하고 이를 통해 한국 학계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내고자 한다.
“하버마스의 인기는 국내 학술영역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열기조차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수많은 전공자들과 전문연구자들이 하버마스를 완전히 버렸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스캔들이다.”
저자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1960년대 프랑스 학술장 분석에 사용한 ‘장(field)’ 이론을 활용한다. 부르디외는 학술장의 발전을 지식인들이 내부에서 고도로 전문화된 자신들만의 상징투쟁을 벌이는 공간을 문화적,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했다. 또 학술장 발전의 핵심 동력은 주어진 학술적 주제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한편, 지적 동료로서 함께 협력하는 동시에 비판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친밀한 적대자’ 공동체들의 형성이라고 봤다.
저자는 이 분석틀을 이용해 국내 하버마스 열풍이 학술장 형성이나 이론그룹 형성에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딜레탕티즘’과 ‘학술적 도구주의’를 꼽는다. 딜레탕티즘은 학술장의 주류 엘리트들이 ‘좁고 깊은’ 학술적 탐구를 수행하기보다 ‘얕고 넓은’ 지식을 생산함으로써 손쉽게 취득한 상징권력으로 장 내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재생산하는 데 안주하려는 성향을 뜻한다. 학술적 도구주의란 학술 지식 생산의 목적을 학술 외적인 것, 주로 사회변혁적인 요청에 부응해 그 실현에 봉사하는 것에 두면서 장 외부로부터 인정을 얻으려는 성향을 의미한다.
책은 하버마스 신드롬의 형성과 해체 과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서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지배적인 성향이 딜레탕티즘과 도구주의라는 것을 드러낸다. 저자는 “(하버마스) 도입 초기 학술지 공간에서 드러난 핵심 특징은 단연코 딜레탕티즘이었다”면서 “학술적 탐구의 대상을 바꿔가며 개론적 지식만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재생산하려고 했던 이들, 나아가 당시 제도권 학술영역 성원들 일반이 띠었던 딜레탕티즘 성향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또 초기 하버마스 수용의 중심지였던 비주류 학술운동권에서는 하버마스를 철저히 마르크스주의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다. 하버마스는 198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하는데, 국내 학술운동권은 도구주의에 빠져 하버마스가 이미 버린 내용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90년대에는 하버마스 인기가 공동 연구자 집단을 형성할 만큼 고조되었다. 저자가 ‘하버마스 네트워크’로 명명한 이 집단은 신진 하버마스 연구자 그룹이 중심이 되어 학술운동 영역의 비주류 변혁주의 그룹을 연결하고, 여기에 주류 이론가 교수 그룹이 가세한 것이었다.
하버마스 네트워크는 하버마스 방한 이벤트가 끝난 후 급속히 해체된다. 저자는 세 그룹의 이후 학술적 행보를 추적한다. 하버마스 네트워크에서 중핵을 담당했던 한신대 윤평중, 서울대 한상진, 계명대 이진우 교수의 이탈 궤적을 각각 보여주면서 “그들이 딜레탕티즘의 성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며 “이들이 속한 주류 학술공간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신진 연구자 그룹도 주류를 따라 딜레탕티즘으로 가거나, 변혁주의 그룹이 회귀한 도구주의에 합류했다. 저자는 하버마스 네트워크를 이뤘던 수십 명의 학자들이 별다른 성과도 없이 산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장이 부재한 한국 학술영역의 현실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묘사한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하버마스 네트워크가 유지됐더라면 “하버마스를 해석하고, 변용하고, 갱신해 한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태동시켰을지 모를 일이다”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서구 이론 추종이 한국 사회과학계의 문제라는 진단에 이견을 제출한다.
“한국 학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맞이한 인문사회과학 전반의 위기의 원인을 주로 서구종속성 현상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추적한 하버마스 수용과정이 말하는 것은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의 정반대, 그러니까 한국 인문사회과학 학술영역이 어떠한 서구 이론도 충분히 몰입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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