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지고 박제된 전통으로 남아 있는 이 공간 [우리 도시 에세이]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수십 년 전, 이 길에 들어설 때마다 '하필 전통문화 공간을 상업화 하려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곤 했다. 곳곳에서 변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길은 고즈넉했고 인사동 특유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 인사동길 초입 안국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인사동길을 이루는 초입. 1km 남짓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여전히 북적인다. |
ⓒ 이영천 |
이 길은 보헤미안의 공간이기도 했다. 민예총과 민미협이 들어서자 민중미술가와 만화가는 물론 해직 기자와 해직 교수 등 시대가 탄생시킨 방랑자 차지였다. 1980년대 후반 형성된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레 문인과 작가, 공연예술인, 화가와 사진가는 물론 언론인과 지식인을 끌어모으는 구심력으로 작동했다.
구석구석 박힌 크고 작은 술집들은 늘 이들 차지였고, 그곳에선 세상 이야기와 문학, 진지한 예술 담론이 술잔을 넘실거렸다. 찻집은 물론 지필묵 내음 가득한 음식점도 여럿이었다. 이때부터 1990년대까지가 인사동 최전성기였다. 그때까지는 앞의 물음이 유효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사동길은 시나브로 예스러운 정취를 잃어갔다.
인사동길
▲ 도화서 터 견지동 우정총국 앞이 18세기 초중반까지 도화서가 있던 자리다. 이로 미루어 도화서가 인사동 탯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
ⓒ 이영천 |
관훈동이 인사동길 대부분이고, 정작 인사동은 일부에 불과하다. 18세기 중반까지 도화서가 있었던 조계사 앞 견지동도 인사동길 통칭이다. 도화서가 광교 근처로 이전했음에도, 그 존재는 인사동의 탯줄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자연스레 그림을 사고 팔았으며, 문방사우를 취급하는 점포가 있었으리라.
인사동길은 전통문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는 공간구조가 규정한 인지 특성이다. 전통과 문화는 익숙하나 어려운 말이다. 사전적 정의도 추상적이며 어려운 말투성이다. 이를 잇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전제에서 이 길을 살피면, 인사동길은 분명 전통문화의 맥이 흐르는 공간임은 분명하다.
와르르 쏟아진
인사동의 변화도 강압된 근대화와 함께였다. 왕조를 지탱해 온 계급구조의 표면적 해체는 갑오개혁(1894)이었지만, 종이에 적힌 문구일 뿐 실질엔 이르지 못했다. 강제 병합 후속 조치인 '조선귀족령(1910)'으로 76명의 귀족이 탄생한다.
왕조시대 권력과 경제력을 거머쥐었으나 일제 귀족에 포함되지 못했거나 거부한 양반이, 이때부터 실질적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강제된 계급 해체다. 부와 권력을 뒷받침하던 경제 기반도 같이 해체당한다.
▲ 통문관 관훈동에서 1934년 서점을 열었고, 1943년부터 이 곳에 자리하고 있는 고서점 통문관. 인사동길의 얼굴 격이다. |
ⓒ 이영천 |
안국동천 복개는 급격한 변화를 추동한 흐름이었다. 천도교 교당과 승동교회 등 종교시설, 인쇄소와 한성도서 등 출판사, 태화관 같은 요릿집과 해정병원 등이 근대화 바람을 타고 인사동에 들어선다. 길 좌우로 골동품과 고서화 등을 취급하는 상가가 들어선다. 종로와 충무로에 있던 통문관 등 여러 고서점도 이때 옮겨온다.
일제 강점기 전국적으로 셀 수 없는 문화재가 일본으로 빠져나간다. 인사동도 그 통로 중 하나로 1930년대부터 전성기를 맞는다. 값나가는 문화재를 취급하는 골동품점이 호황을 구가하며, 진귀한 문화재가 일본인들 손아귀에 넘어간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면, 분명 비극적 흐름이었다.
잇고, 변화하는
▲ 통인가게와 주변 인사동을 대표하는 골동품점 통인가게(우측)와 주변 모습. 2층으로 된 전면부는 옛 모습을 보전하고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 중 하나다. |
ⓒ 이영천 |
미술 붐이 일기 시작한 1970년대, 인사동은 현대화랑을 필두로 상업화랑 시대를 구가한다. 화랑 여럿이 속속 문을 열고, 김기창 등 유명 화가의 화실도 인사동에 있었다. 고서와 그림에 대한 잠재 수요증가로 고미술상이 전성기를 누렸고, 예술가와 문인의 발길이 잦아진다. 이들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길 안 한옥에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음식점이 차례로 들어선다.
▲ 길 안 골목 길 안 골목의 모습. 가회와 귀천, 여자만 등 인사동 공간조직에서 한 시대를 보낸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다. 천도교 교당이 보인다. |
ⓒ 이영천 |
민정당이 1981년 조계사 앞 관훈동에 당사를 마련하고, 3당 합당 후인 1990년부터 민자당 서울시지부로 쓴다. 당사가 있었어도 정치인들은 인사동에 어떤 순기능도 불어넣지 못했다. 다만 밥만 먹고 가는 이들을 겨냥한 가회 등 한정식집이 이때 생겨난다.
찢겨 박제화한
오히려 이젠 이 길을 '어떤 모습으로 상품화해야 전통문화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가 화두인 시대다. 차에 빼앗긴 보행권을 되찾아주려는 시작은 분명 선의였고 방향도 옳았으나,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다.
▲ 남측 초입 대일빌딩 앞 인사동길 종로 방향에서의 남측 초입 모습. |
ⓒ 이영천 |
평일 차 없는 거리(2011)를 만들자, 길이 인파로 채워진다. 몰려든 인파는, 인사동길 점포 주인을 순차적으로 바꿔나갔다. 고서점과 화랑, 민속공예품 등이 값싼 기념품이나 옷, 화장품과 아이스크림 가게에 밀려나야 했다.
이를 막고자 허용업종을 강력히 규제하는 '문화지구(2002)'로 지정한다. 전통문화 보존과 활성화가 목적이나, 부작용과 편법도 만만찮은 게 현실이다. 문화지구는 오히려 찢겨 박제화한 몇몇 표식과 기호만 상징처럼 이 거리에 남겨 놓았을 뿐이다.
▲ 안녕 인사동 옛 민정당사 자리에 들어선 호텔 등의 복합시설물. 인사동의 특별계획구역 지침에 따라 길 쪽으로 마당을 확보해 들어선 건물이다. |
ⓒ 이영천 |
낙원상가 서쪽의 작은 블록과 예전 종로경찰서 동쪽은 고층 빌딩 일색이다. 대성산업에서 삼성화재로 주인이 바뀐 옛 민정당사 자리엔 낯선 얼굴의 호텔이 인사동길을 압박한다. 안국 사거리와 태화관 자리 및 주변은 오래전 고층화하였다. 인사동 옛 피맛골은 철거재개발로 벌거숭이가 되어버렸다. 어떤 이질감이 이 공간을 채워갈지 생각만으로도 어지럽다.
골목이 사라진 곳에선 어떤 전통의 맛도 느낄 수 없다. 도시형 한옥은 인사동길과 삼일대로 사이에 옹색한 모양새로 남았을 뿐이다. 이 작은 공간이나마 어찌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를 모색해야 할 때다.
긴 시간, 다른 방향으로
길이 흐름이듯, 공간도 그렇다. 인사동은 변화하는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시 다른 얼굴을 할 것이다. 시간이 만드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떤 방법으로 공간 특성을 지켜낼 것인가?
공간 특성을 잃은 인사동길은 골목마저 잠식당하고 있다. 업종규제가 능사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규제로 특성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이해하지만, 이 방법은 분명 한계가 농후해 보인다. 차가운 자본의 공격은 늘 있었고 더 강해질 것이다. 가장 먼저 변화에 순응하자. 흐름에 맡기고, 외부에 보여주는 박제화한 전통부터 버리자.
▲ 옛 인사동길(1950년대) 1950년대 인사동길. 한옥이 즐비하여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풍광이다. (붉은 숫자) 1. 인사동길 2.탑골공원옆 삼일대로 3. 지금의 삼일대로 4. 낙원상가 자리의 옛 모습. |
ⓒ 서울역사박물관 |
일정 면적의 필지 병합을 불허하고 골목은 어떤 경우라도 존치하자. 이로써 공간구조만이라도 지켜내자. 그리고 목조 한옥에 초점을 맞추자. 긴 시간을 갖고, 신축 필지에 이를 적용해 바꿔보자. 기술발달로 수 개 층 한옥도 건립이 가능해졌다. 백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후세대가 누릴 몫으로 남겨두자. 이게 순치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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