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냇머리부터 백발까지... '머리카락의 시선'에서 삶을 보다
지난달 말 출간된 그림에세이 『모락모락』(문학동네)은 갓 태어난 아기의 배냇머리로 시작해 100살 할머니의 모습까지, 인생을 머리카락의 시선에서 그려낸 책이다. 평생 머리카락을 만지며 산 헤어 디자이너 차홍(41·본명 김효숙)이 썼다.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차홍아카데미에서 만난 차홍은 "뷰티업계에 20여년 종사하다 보니 사람을 머리카락으로 기억하게 되더라"며 "피부와 모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머리카락이 저에게 얘기하는 것 같아 머리카락의 시선으로 썼다"고 전했다.
1세 배냇머리부터 100세 은발까지… 머리카락이 본 삶
차홍은 헤어 디자이너이자 미용 전문가로, 방송 출연으로 대중에게도 익숙한 인물이다. 미용 관련 실용서와 뷰티 에세이 등 '전공' 관련 책을 쓴 적은 있지만, 이처럼 사람 냄새 진한 책을 쓴 것은 처음이다.
그는 3년 전 크게 아픈 뒤 '인생이란 뭘까' 곱씹으며 쌓인 생각들을 정리해내듯 두달 만에 써냈다고 했다. "뭐든 정리를 해야 속이 시원한데, 머릿속에 맴돌던 것들을 정리하고 나니까 마음이 굉장히 편안했다"며 "읽은 사람들이 다 '내 얘기 같다'고 말할 때 뿌듯했다"고 말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머리카락이 겪어내는 인생은 한 살 당 한 페이지, 한 장면으로 축약했다.
"엄마는 머리를 밀면 더 잘 자란다고 말하는 중이야."(2세), "맙소사, 너는 여드름을 숨기려 나를 희생시켰지만 앞머리로 가리면 더 심해진다고."(17세), "탈색이 끝나고 미용실을 나왔을 때, 병아리 털처럼 변한 내가 바람에 흩날렸지."(20세), "새치가 몇 가닥 보이네. 너는 시무룩했지. 나는 할 말이 많았어.(…)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39세), "샴푸를 하고 의자에 앉으니 세상에! 내가 배춧잎처럼 보글보글 변해 있잖아? 나는 정말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다고."(69세), "예전에는 머리를 자르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는데, 이제는 하얀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네. 언제 내가 이렇게 가벼워진걸까."(84세)
앞머리로 여드름을 가리는 이야기, 첫 탈색의 당황스런 경험 등에는 머리카락과 관련한 자신의 기억을 섞어 넣었다. 휴가 이후 상하는 두피나 다이어트 후 빠지는 머리카락의 항변, 정기적으로 가르마 위치를 바꿔줘야 하는 이유 등 전문가 입장에서의 조언도 곳곳에 담겨 있다. 겪어보지 않은 나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인학' 책까지 들여다봤다고 한다.
"가장 오래 함께 한 건 내 머리카락… 99세의 깨달음 전하고 싶어"
그림과 글이 섞인 동화책 같은 책이지만, 그는 "동화책을 염두에 둔 건 아니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아껴주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뷰티 관련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봤다"는 그는 책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99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머리카락을 제대로 보고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한 건 너 뿐이네"라고 말하는 대목을 꼽았다.
내성적 문학소녀의 '예쁜말', 대중을 홀렸다
평소에도 손님들에게 편지를 자주 쓴다는 그는 이번 책도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 느낌으로 썼다"고 했다. 어린 시절 소심하고 목소리가 작아 친구가 적었다는 차홍은 혼자 논에 누워서 별을 보며 자랐고, 시인 윤동주를 좋아해 학교 문예반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 같으면 기겁했을 물뱀을 보고 '무늬가 디자인적으로 너무 예쁘네'라고 감탄했던, 독특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 감성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빛을 발했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2015~16)에 출연해 "날리는 머리가 코스모스처럼 너무 예뻐요", "(구레나룻이 빨리 자라는 손님에게) 성장 속도가 굉장히 뛰어나네요. 어리다는 증거니까 좋은 거에요" 등 독특한 관점의 칭찬을 쏟아내, '긍정 여신'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후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꾸준히 섭외가 들어왔지만 "재밌는 사람이 아닌데, 민폐가 되고 싶지 않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책의 한 장면을 들어 설명했다.
"제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모락모락』의 100세 장면이에요, 요양원에서 열린 생일 파티에 많은 사람이 모여 축하해주는 삶 말이죠.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일상에서 오는구나'라고 깨달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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