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대로 삭제" 지시 직권남용‧증거인멸 될까…확산되는 갑론을박
규정상 삭제가 원칙인 보고서를 압수수색 직전에 삭제한 행위를 증거인멸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경찰 안팎과 법조계를 중심으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용산서 정보관 A씨는 지난달 26일 ‘핼러윈 축제 공공안녕 위험 분석’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서울경찰청 첩보관리시스템에 등록했다가 지난 2일 삭제했고 본인의 PC에 저장된 파일도 지웠다. 지난 2일은 이태원 참사 부실 대응 의혹 수사에 나선 경찰 특별수사본부가 용산경찰서 등을 압수수색한 날이다. 특수본은 삭제가 상부의 ‘회유’에 의한 것이라는 A씨의 진술을 토대로 용산서 정보과장과 계장을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입건하고 직위해제 조치했다. 여기에 경찰청 특별감찰팀이 박성민 서울경찰청 공공안녕정보외사부장이 지난 1일 용산서를 포함한 일선 경찰서 정보과장들이 모인 단체채팅방에서 “정보보고서를 규정대로 삭제하라”는 취지로 말한 것을 확인해 지난 7일 특수본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보고서 삭제를 둘러싼 의혹은 경찰 지휘부로 번지는 양상이다. 특수본은 10일 용산서 소속 정보관들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문제는 쓸모가 다한 정보보고서는 대통령령인 ‘경찰관의 정보수집 및 처리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삭제가 원칙이라는 점이다. ‘수집·작성한 정보가 그 목적이 달성돼 불필요하게 됐을 때는 지체 없이 폐기해야 한다’(7조 3항)는 조항이다. 경찰은 통상 정보관들에게 시스템 등록 후 72시간이 지난 보고서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삭제하라고 주문해 왔다.
“폐기 규정이 있다면 혐의 적용 어려워”
문재인 정부 경찰개혁위원을 지낸 양홍석 변호사는 “정황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폐기 원칙이 있는 이상 현재 드러난 사실관계에서는 증거인멸죄나 직권남용죄를 적용하기 어렵다”며 “지시를 안 했어도 규정대로라면 보고서를 삭제해야 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양 변호사는 “지난 정부 경찰개혁위원회에서 정보의 ‘열람 후 파기 원칙’ 대신 ‘보관’ 원칙을 제안했었는데 실현되지 못했다”며 “그때 바뀌지 못한 원칙이 문제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당 정보보고서가 증거인멸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도 쟁점이다. 검사 출신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증거인멸죄가 적용되려면 우선 해당 보고서가 ‘증거’가 될 수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증거인멸죄(형법 155조)는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나 증인을 인멸·은닉·도치·위조·변조 등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는 범죄다. 정보보고서가 수뇌부의 업무상 과실치사상죄 등의 증거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고의적 인멸행위가 있었더라도 증거인멸죄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경찰 출신 박상융 변호사는 “단순히 ‘핼러윈 때 이태원에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이라는 일반적 내용의 보고서라면 증거능력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보고서 목적 달성 안 돼…증거 능력도 있다”
서울청 정보부장 등의 행위가 위법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이창민 변호사는 “목적이 달성돼 불필요하게 됐을 때 보고서를 폐기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목적 자체가 달성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며 “해당 보고서가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증거이자 향후 대책을 세우는 것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상황 정보’이자 ‘정책 정보’이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경찰 지휘부가 정보보고서를 받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업무상 과실치사상죄가 적용될 수 있기에, 해당 보고서는 주요한 증거능력을 갖고 있다”며 “이 때문에 삭제할 이유가 없는데도 삭제 지시를 한 것은 직권남용,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사실을 은폐한 것은 증거인멸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특수본은 참사 당일 ‘각시탈’을 쓴 두 명이 길에 아보카도 오일을 뿌려 사람들이 쉽게 미끄러지도록 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을 불러 조사했다. 특수본은 또 해밀톤호텔 등을 압수수색해 대표이사 B씨 등의 휴대전화 5점과 건축물 설계도면 등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건축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입건된 B씨에 대해선 이날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김남영 기자 kim.namyoung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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